결혼 20주년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새해를 맞았다.
12월 중순부터 1월 중순까지, 구직 시장은 한겨울 꽁꽁 언 호수 위에 눈보라가 휘날리는 것처럼 휑했다. 이력서를 내밀어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기다림은 점점 불안으로, 초조함으로 변했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설날까지는 뭐라도 실마리가 있어야 할 텐데…'
달력의 붉은 설 연휴 표시가 괜히 부담스러웠다. 백수에게는 명절이 달갑지 않다. 가족들 앞에서 애써 태연한 듯 웃음 지어도, 스스로는 억지 연기라는 걸 안다.
학교에 있어도 마음 둘 곳이 없었다.
몇 날 굶은 피난민이 따뜻한 죽 한 그릇을 간절히 바라듯,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휑한 겨울 교정을 배회하거나 허 교수 연구실 앞을 서성였다.
세어 보니 이미 40곳 넘는 회사에 이력서를 냈다. TV에서는 평창동계올림픽 중계가 한창이었다. 메달 딴 선수들의 환희에 찬 인터뷰가 연일 이어졌지만, 내게는 단 한 번의 면접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지난 3년 동안 학교에서 뭘 한 거지?'
박사공부는 마법의 문을 여는 열쇠가 아니었다.
그건 내 머릿속에서만 그럴싸하게 맴돌던 신기루에 불과했다.
회사 규모도 가리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경력이 닿을 만한 곳이면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넣었다. 그러나 회사라는 모든 생명체가 죽었는지 도대체 반응이 없었다. 뭐라도 건덕지가 있어야 거취라는 걸 고민할 텐데, 마치 새벽안개 자욱한 호수 위에 끈 풀려 떠다니는 작은 배처럼 나는 그저 막막했다.
‘결혼할 때는 IMF가 터져서 백수 신분으로 예식장에 들어서더니, 결혼 20주년인 올해에 또 백수가 되었구나.’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 무렵, 열심히 다녔던 교회에도 발길을 끊었다.
어느 날, 아내의 초대로 담임목사님이 가정방문을 오셨다. 나는 그분께 따지듯 물었다.
“목사님, 하나님 정말 계시긴 한 거예요?
어쩌면 저한테 이러실 수가 있죠.
하는 일마다 이렇게 꼬이고, 되는 일이 하나 없어요.”
목사님은 내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조용히 말씀하셨다.
“분명 하나님의 뜻하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는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안수기도를 하고 떠났다.
나는 점점 아래로, 더 아래로 가라앉았다.
주인 식탁 아래 떨어진 빵부스러기로 연명하는 개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생계만 이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가족의 생계조차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면서, 기약 없는 꿈만 얘기하는 가장. 그건 허무한 말장난이자 자기 기만일 뿐이었다.
특별한 날들이 이어졌다.
“설마 여기는 되겠지” 싶었던 회사들조차 묵묵부답이었다. 일희일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학사지원부를 들러 졸업요건을 확인한 뒤, 허 교수를 찾아뵈었다. 취업이 예상보다 어려워 졸업예정자 자격이라도 얻으면 조금 나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모진 말들이 오갔지만 나는 무덤덤했다.
설날이 지나고, 2월 끝자락.
스팸이라 생각해 받을까 망설였던 전화가 걸려왔다.
“AI 스타트업 S사입니다. 혹시 면접 가능하실까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회사는 지난해 10월쯤 예전 직장 동료에게 보냈던 이력서가 돌고 돌아 닿은 곳이었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급물살을 탔다.
면접은 순조로웠고, 며칠 후 합격 통보가 왔다.
샛노란 개나리가 한창이던 봄,
마흔여덟의 나이에 나는 재취업에 성공했다.
출근 전날, 나는 허 교수 책상 위에 손 편지를 올려두었다. 그간의 주신 은혜와 가르침에 감사드리며, 교수님께 배운 ‘연구자의 자세’를 잊지 않겠다고 적었다. 그리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지만, 학업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4월 2일 월요일.
3년 2개월 머물던 학교를 떠나, 나는 다시 강남역 출근길 인파의 일원이 되었다. S사는 기업고객 대상으로 AI 모델링 컨설팅과 관련 솔루션을 제공하는 회사였다. 박사과정 동안 공부한 분야와 예전 경력이 잘 맞아떨어졌다.
회사 건물 로비에 안내 로봇이 있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것으로 보였는데, 호기심에 끌려 로봇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명훈이야, 넌 이름이 뭐니?”
로봇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나를 바라봤다. 앙증맞고 엉뚱한 모습이 귀여웠다.
며칠 뒤, 아내가 말했다.
“이제 한숨 돌렸으니, 하루쯤 어디 다녀올까?"
좋은 생각이었다. 위로받고 싶었다.
4월 첫 주말, 우리는 안면도로 향했다.
가는 길에 서산에서 유명하다는 간장냉면을 먹었다. 설마 간장으로? 의심도 잠시, 가게 문을 열자 간장 졸인 냄새가 훅 밀려 들어왔다. 도착한 서해 바다에는 생업에 종사하는 현지인이 한둘 눈에 띌 뿐 아직 시즌 전이라 한적했다. 해변을 따라 소나무가 길게 띠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다.
펜션 베란다에서 삼겹살을 굽고, 소주를 곁들였다. 너구리 라면이 특유의 향을 날리며 끓고 있었다. 서해의 노을이 수평선을 붉게 물들였다. 어릴 적 할머니가 연탄불로 뚝배기에 끓여 주시던 잊지 못하는 라면 맛, 이날 라면 맛이 그랬다.
그날 밤. 우리는 한적하고 포근한 그 풍경과 어우러져 소주잔을 부딪치며 자축했다.
나의 마흔여덟 재취업, 그리고 우리의 결혼 20주년을.
간조가 된 갯벌에서 드문드문 해루질하는 불빛들이 움직였다. 아내가 말했다.
"우리도 나가보자. 재미있겠다."
맨발에 닿는 바닷물은 아직 차가웠다. 핸드폰 불빛을 비추며 물 빠진 갯벌을 한참 걸었다. 저 멀리 등불을 밝힌 고깃배들이 떠다녔다. 그 불빛이 잔잔한 바다 위에서 반짝였다.
그리고, 뜻밖의 횡재.
생전 처음 해보는 해루질인데, 두레박이 조개로 가득 찼다. 집에 돌아가면 근사한 조개 칼국수를 해 먹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두레박 안 조개가 발을 내밀고 모래를 뺃는 그 한밤, 나는 모처럼 곤한 단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