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지지 않기 위해 살아 있었다

by 티보치나



나는 이미 한번 바닥을 봤다

그래서 다시는 거기까지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은 같은 곳으로 다시 떨어질 수 있더라.

이번엔은 갑작스럽지는 않았다.

조금씩,

아주 천천히 가라앉았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밥을 먹는 것도,

씻는 것도,

말하는 것도.

하나하나가 너무 많은 힘이 필요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하루를 그대로 흘려보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만 지나가는 하루들.

그게 하루가 되고

이틀이 되고, 며칠이 되니까 나는 점점

시간과 멀어졌다.

생활고에도 시달렸다.

아침과 밤이 구분되지 않았고, 어제와 오늘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비슷한 상태가 계속 반복되었다.

몸은 점점 무거워졌고, 생각은 느려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계속 나는 지쳐있는 상태였고,

나는 이 상태가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한번 겪어봤기 때문에.

하지만 막으려는 힘이 남아있지 않았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내려갔다. 더.


조금 더,

조금 더.


생각이 줄어들고

감정이 사라지고

남는 것은 아주 희미한 존재감뿐이었다.

나는 진짜 살아있는 건지 아닌지

확인하지 않으면 구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가끔 숨을 참아보고,

자주 자살시도를 해봤다.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

그 순간만큼은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게 조금은 느껴졌기 때문에.

하지만 그 마저도 점점 의미가 없어졌다

나는 더 이상 나를 붙잡지 않았고

그냥 흘러가게 두었다.

나는 그 상태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올라오려고 하지도 않았고, 버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멈춰 있었다.

시간은 계속 지나가고 있었지만 나는 그 안에 제대로 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동안 라디오를 듣는 일에 빠져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람들의 목소리를 흘려듣고,

사연을 듣는 게 이상하게도 편했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다.

그저 듣고만 있어도

어딘가에 연결되어 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날, 가벼운 마음으로 사연을 보냈다.

큰 의미는 없었다 그저 한 번쯤 말해보고 싶었던 소소한 이야기였다.

그저 조금은 웃을 수 있는 이야기,

조금은 덜 아픈 이야기.

그런데 그 사연이 방송에 올라갔고,

내 이름이 불렸고, 나는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낯선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안녕하세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멈췄다.

그 인사가 이상하게도 오래 남았고,

나는 대답을 했다.

"안녕하세요."


그 한마디를 내 입으로 내뱉는 일이

그날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그 순간만큼은 누군가와 같은 시간 안에 있었다.

통화는 짧게 끝났고, 경품으로 아웃백 상품권을 받았다.

하지만 그날 나에게 남은 것은 상품권 한 장이 아니라

그 짧은 연결감이었다.

내 목소리가 어딘가에 닿았고,

그걸 누군가가 들었다는 사실.

그게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나는 한동안 그 통화를 자주 떠올렸다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그날 이후로 조금 덜 끊어진 느낌이 들었다.

그때 느낀 게 있다.


사람은 항상 큰 이유로만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걸.

아주 사소한 것들로도

겨우 이어질 수 있다는 걸.

아주 사소한 순간에도, 잠깐의 목소리에도

누군가의 짧은 인사에도

다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그래서 나는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 보고,

물을 마시고, 밥을 조금 먹고, 몸을 움직여봤다.

그게 살아가기 위한 행동이라기보다는

그냥 끊어지기 위한 움직임에 가까웠다.

나는 여전히 자주 멈췄고

자주 무너졌고, 자주 그날로 돌아갔지만

한 가지는 달랐다. 완전히 놓아버리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붙잡고 있었다

자살충동이 올라오는 날엔 보호센터에 전화해서 도움을 요청했고,

그 사이에서 나는 계속 살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아주 조금 나를 버티게 했다.

살고 싶어서 버티는 건 아니었다

그럴 만큼 단단하지도 않았고

그럴 이유도 뚜렷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살아지고 있었다.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하루가 지나가 있었고, 어떤 날은 겨우 반키를 먹었을 뿐인데

하루를 버틴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걸 살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 건지,

그냥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자살시도를 하지 않고 계속

끝나지 않고 있다는 것.

사람들은 삶을 의지로 살아가는 것처럼 말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작은 단위로 살아왔다.

숨 한번, 물 한 모금, 누군가의 짧은 말 한마디.

그런 것들이 나를 조금씩 이어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제는 생각을 조금 바꿨다.


'잘살아야 한다'는 생각 대신

'끊어지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완벽하지 않아도 되고,

괜찮지 않아도 되고,

무너지지 않기만 하면 되는 삶.


나는 그 정도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나한테는

충분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그렇게 나는 끊어지지 않기만 하면서

하루를 하나씩 넘겼다

여전히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아침이 밝아도

몸은 무겁고

생각은 느렸고

이유 없이 가라앉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도 이상하게 완전히 같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아주 미세하게,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어딘가가 조금씩 달랐다.

어느 날은 물을 마셨을 때

목을 타고 내려가는 감각이 조금 더 선명해졌고

어느 날은 창문을 열었을 때

들어오는 바람이 조금 더 상쾌하게 느껴졌다.

그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나는 그걸 '나아졌다'라고 부르기엔

너무 작아서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작은 감각들이 자꾸 나를 붙잡았다.

'아, 나는 완전히 꺼진 건 아니구나.'

그건 희망이나 다짐도 아니었다

그냥 확인에 가까운 거였다


나는 여전히

자주 멈췄고

자주 무너지고

자주 자해시도를 했으며

자주 자살시도도 하고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예전처럼 완전히 내려가려고 했다

익숙한 방향으로.

그대로 바다에 가라앉는 것처럼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내려가기 직전에 작은 걸림 같은 게 생겼다


'사랑.'

다시 올라오지도 못하면서

그냥 완전히 떨어지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태에서 만났던 K,

멈칫했다.

그 '멈칫'이 나를 살렸다.

아주 작게라도 멈추는 순간,

그 순간만 넘기면 어떻게든 그다음으로 이어졌고,

그걸 연습하기 시작했다

무너지지 않는 연습이 아니라

완전히 내려가지 않는 거.

울다가도 잠깐 숨을 고르고,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도

그냥 스트레칭이라도 해보고

하루가 다 망한 것 같아도

그날을 그냥 끝까지 보내보기.

그 정도였다 정말 그 정도다.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일기장에 적었다.


살아가는 건

거창한 일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선택들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여전히 잘 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무너지고, 여전히 버티는 날이 더 많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나는 이제 완전히 끊어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지 않아도,

그래도..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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