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게 하는 것들의 목록

by 티보치나

나는 2016년부터 정신과를 다니고 있다

병원들은 늘 비슷하게 생겼다.

정신건강의학과.

어딘가 비슷한 표정들의 사람들.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고, 내 이름이 불리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구조.

매번 질문은 똑같다.


"요즘은 어떠세요, 약은 제때 잘 먹고 계세요?"

"네."

처음 다닐 때는 이것저것 많이 설명하려고 했다

왜 힘든지,

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어떤 생각이 드는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말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냥 빨리 약만 타고 집에 가고 싶었다.

말로 설명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없었고,

의사들은 기계적이기만 했다.

대신 기록이 남았다.

차트, 진단명, 약.

우울,

불안,

자살고위험군


나 자신은 정확히 구분하지 못했지만 서류상에는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약은 여러 번 바뀌었다.

어떤 건 잠을 재웠고,

어떤 건 잠을 재우지 않고 계속 나를 흥분시키게 만들어서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고,

어떤 건 몸무게가 10kg씩 늘기도 했으며

어떤 건 생각을 느리게 만들고,

기억을 흐트러지게 만들었고

어떤 건 아무 느낌도 들지 않고 멍하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 변화들이 낯설었지만

나중에는 그냥 받아들이게 됐다.

나는 그걸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그렇게 판단하지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다.

나에게 맞는 약을 찾아야 된다며,

폐쇄병동에도 몇 번이나 입원을 했다.

진단은 여러 번 바뀌거나, 조금씩 추가되었다.

약할 개수가 제일 많이 먹은 기억은 하루에 46알이었다. 자기 전 먹는 약은 24알이었다

한 번은 물어본 적이 있다.


"저, 이 병 나을 수 있는 건가요?

약 끊을 수 있어요?"


"당뇨약이라고 생각하세요."


그 말은 설명이 아니라 결론이었다.

설명도, 위로도, 가능성도 없었다


약은 줄이는 게 아니라, 맞추는 거였고

계속 이어가는 거였다.

끊을 수 있는 순간을 기다리는 병이 아니라

끊으면 바로 무너지는 상태.

낫는 병이 아니라, 유지하는 상태.

끊는 것이 아니라, 계속 가져가는 것.

끊을 수 있는 날이 오는 게 아니라,

끊지 않아야 한 쪽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걸.

우울증 약은 언젠가 끝나는 치료가 아니라

끝나지 않는 조건에 가까웠다.


나는 혼자 단독적으로 약을 한번 끊어봤다.


약을 먹지 않는 날을 만들었다.

하루, 이틀.

잠을 거의 못 자서 흥분된 상태로

계속 안절부절못하는 것 빼고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았다. 잠을 계속 못 잤는데도 몸이 조금 가벼웠다.

머리를 누르던 압박이 빠지는 느낌이랄까

나는 잠깐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흘째부터 이상했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오고, 시간은 흐르는데

단 한 번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다음부터 생각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았다. 하나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생각이 밀려왔고, 정리되지 않은 채로

기억들이 겹쳐졌고, 겹쳐진 채로 쌓였다.

불안에 잠식되었다. 머릿속이 아니라

두개골 안쪽을 긁어내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엄청 빨리 뛰었다.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숨이 가빠졌고,

이유 없이 식은땀이 나고

손이 떨렸고, 턱이 굳어버렸다.

자해도, 자살시도도 하지 않았는데

몸이 계속 위기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그게 돌아왔다

익숙한 생각.

끝내도 된다는 생각.

여기까지면 충분히 잘 버텨왔다는 생각.

그건 새로운 감정이 아니라, 원래 있던 걸

다시 꺼낸 것뿐이었다.

나는 그지점을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더 가면 다시는 못 돌아온다는 걸.

그래서 멈추고 책상 위에 있던 약을 다시 꺼냈다.

손이 떨려서 약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주섬주섬 주워 담아 먹었다.

개수를 세지 않고, 그냥 정해진 만큼을

입에 털어 넣었다.

약을 먹고 나서도 바로 괜찮아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생각은 멈추지 않았고,

몸은 불안했고, 손은 떨리고, 시간은 끊겼다.

그날 이후로 나는 절실하게 깨달았다

이건 끊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구나

우울증 약은 언젠가 멈추는 치료가 아니라
멈추면 무조건 무너지는구나

그래서 나는 다시 먹었다.

약을 먹고도 무너지는 날이 종종 있다

정해진 시간에 약을 삼키고,

정해진 만큼을 빠짐없이 먹었는데도

그날은 그대로 내려간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이미 어긋나 있었다

숨이 얕았다 깊이 들이마셔도 끝까지 들어오지 않는 느낌. 가슴이 조금씩 조여왔다.

아무 일도 없는데 계속 불안했고,

이유를 찾으려 해도 붙잡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그럴 때마다 항상 내상태를 글로 썼다.

계속 써 내려갔다.

몸이 가라앉았다. 팔을 들어 올리는 것도, 고개를 드는 것도 힘들었지만 일기를 쓰면서 생각은 느리지만, 감정은 더 선명해졌다.

하루는 약이 듣지 않는 날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약으로도 막을 수 없는 쪽으로

이미 기울어져 있는 날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움직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냥 그 상태로 있었다

중간에 몇 번이나 일어나 보려고 했다

물을 마시려고, 창문을 열어보려고.

그런데 몸이 따라오지 않았다.

눈을 뜨는 일조차 너무 멀리 있는 일처럼 느껴진다.

나는 분명 일어나고 싶었는데,

내 몸은 이미 나를 떠난 것 같았다.

약은 나를 완전히 살게 하지도 못하지만,
완전히 끝나게 두지도 않는다.

무너지면서도, 끊어지지 않은 상태로.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약이 나를 완전히 살게 하지 못한다는 것도,

그렇다고 완전히 끝나게 두지도 않는다는 것도.

그사이 어딘가에 내가 놓여있다는 걸.

나는 그 상태를 더 이상 부정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무너지지 않는 날을 만들려고 애썼다

괜찮아지려고 했고, 버텨내려고 해고,

이 상태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방향이 나를

더 무너지게 만든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방향을 바꿨다.


나는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대신, 무너져도 끊어지지 않는 쪽으로

하루를 이어간다.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서 하루를 보낸다

그날은 그걸로 끝이다.

억지로 일어나지 않고, 억지로 버티지 않는다.

그 대신, 다음날이 오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약을 먹고, 다시 한 줄을 쓰고,

다시 식물에게 물을 준다.

나는 더 이상 완벽하게 살아내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하루를 아주 작게 쪼갰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약을 먹는다.

그다음에는 물을 한 컵 마시고, 씻는다.

식물에 물을 주고, 한 줄을 쓴다.

이건 계획이 아니라, 순서였다.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따라갈 수 있는 정도의

단순한 흐름 같은 것.

나는 그걸 매일 반복했다.

잘하려고 하지 않았고, 많이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떤 날은 그 순서중 하나만 해도 충분했다

약만 먹어도, 그날은 이어진 거였다.

나는 이제 하루를 완성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하루를 끊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조 안에서 나는 조금 덜 무너졌다.

완전히 괜찮아지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제 안다.


나는 살리는 건 특별한 방법이 아니라

이렇게 반복되는 아주 사소한 구조라는 걸.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 순서를 따라간다.


생각하지 않아도

이어질 수 있는 쪽으로.

나는 의지로 버티는 게 아니라,

구조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날 느꼈다

이건 벗어나는 종류의 병이 아니라는 걸.

그렇게 몇 년씩 약을 먹으면서 나는 알게 됐다

이곳은 나를 완전히 낫게 만드는 곳이 아니라,

완전히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두는 곳이라는 걸.

나는 여전히 무너졌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가끔은 모든 걸 끝내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나는 다시 이곳에 왔다.

꼬박꼬박.

이유는 크지 않았다.

그냥 여기가 내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곳이었기 때문에.


진료가 끝나고 나는 처방전을 받았다.

내 약들은 일반약국에서 처방받을 수 없는

약이기 때문에 병원 안에 있는 약사한테

가서 받아야 했다. 그 과정도 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약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먼 길,

나는 언제까지 이 약봉투를 들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생각해 보니, 그건 끝이 있는 질문이 아니라

끝없이 반복되는 생활인 거 같다.

미래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이미 시작되어 버린 현재의 연장 같은 거.

아마 끝까지 일 것이다.

놓지 않는 쪽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이니까.

아니다, 그냥 그 질문 자체가 틀린 것 같다.

언제까지가 아니라 끝까지 인 거 같다.


끊는 시점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치료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유지되고 있는 상태기 때문에.

약을 먹는 이유는 나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였고,

그 무너지지 않음조차도 완전한 상태는 아니었으니까.

나는 이미 망가진 채로, 그 상태를 더 이상 망가지지 않게 붙잡고 있는 중이었다.

약은 나를 살리는 게 아니라

나를 끝까지 죽지 못하게 만드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알게 된 게 있다

이건 끝이 있는 치료가 아니라,

끝까지 가져가야 하는 조건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이걸 고치려고 하기보다

가지고 살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가끔은 그게 선택이 아니라

조건이라는 걸 너무 선명하게 느끼게 되는 날이 있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삶을 이어 것이 아니라

그저 끊어지지 않도록

겨우 붙잡혀 있는 쪽에 서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약을 먹지 않으면 하루가 시작되지 않는다.

몸이 아니라 생각이 먼저 무너진다.

아무 일도 없는데 이미 끝난 것 같은 기분.

그래서 나는 다시 약을 꺼낸다.

삼키는 순간 나는 안다.

이건 치료가 아니라 의존에 가깝다는 것을.

나는 낫고 있는 게 아니라 계속 유지되고 있는 상태라는 걸.

어떤 날은 약을 먹고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날도 있다.

불안은 그대 로고, 생각은 여전히 무겁고,

몸은 느려지고, 멍해진다.

그래서 더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나는 덜 아픈 사람이 된 게 아니라,

덜 반응하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그게 살아있는 건지, 그냥 유지되고 있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게 아니면 버틸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실이

가끔은 숨이 막힐 만큼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무 이유 없이 이 모든 걸

그만두고 싶어지는 순간이 온다.

약도,

병원도,

이 상태도, 전부.

그런데도 나는 다시 병원에 간다.

꼬박꼬박.

왜냐하면... 나는 살고 싶기 때문이다.

아직 다 해보지 못한 것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가끔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나를 붙잡는다.

그날의 기분을 한 줄로 적어두는 일,

다이어리를 예쁘게 꾸미고 뿌듯해하는 것,

좋아하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

시원하게 샤워하고 바디로션을 발랐는데

그 향기가 내 온몸을 감쌀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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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들이 이상하게도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다.

외로움은 배고픔이나 목마름처럼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감각이라고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마음을 피하려 하기보다,

조금씩 길들이기로 했다.

고독을 없애려 하기보다는

그것과 공존하는 법을 배워가기로 했다.

나는 이제 무엇보다 내 자유와

내 표현을 먼저 두기로 해봤다.

그리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가장 앞에 두기로 했다.

내가 보기에 조금 더 따뜻하고,

조금 더 나를 살게 하는 것들을

보고, 느끼며 살아가기로 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확실한 계기가 있었냐고?

음,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억울했던 거 같다.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고

좋아하는 것도 많은데 나한테 상처를 준 사람들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이대로 죽어버리기엔

너무 아깝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사랑을 하고 싶었다.

사랑이 나를 살린 것 같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나는 나 혼자만의 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고립된 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의 거리를 두고

조용하고 완만하게 관계를 이어가며 살아가고 싶다.

image.png

나는 이제 안다.

나를 끝까지 이해하고,

나를 놓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 뿐이라는 걸.

나는 오늘도 나를 데리고 여기까지 온다.

나는 이제 나를 다그치지 않기로 했다

왜 이렇게밖에 못 사는지 묻기보다

지금 이 상태로도 여기까지 온 나를

조금은 인정하고, 토닥여보기로 했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나를 밀어붙이지 않으니까

나는 아주 조금씩 숨을 쉬기가 편해졌다.

여전히 불안했고, 여전히 완전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나를 향해 등을 돌리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알았다.


이 삶은 갑자기 좋아지는 게 아니라,

이렇게 나를 놓지 않는 선택들이

천천히 쌓여 만들어진다는 것을.


나는 오늘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조금 덜 무너졌고,

조금 더 나를 이해하게 되었고,

조금 더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어느 날은 집을 열심히 정리하고, 청소를 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공간인데도
바닥을 닦고, 물건의 위치를 바꾸고,

작은 소품들을 들여놓으며 내가 머무는 자리를

다시 만들었다.

그건 단순히 공간을 정리하는 일이 아니라,

흐트러진 나를 다시 제자리에 놓는 일이었다.
식물을 하나, 둘 늘려갔다.

물을 주고, 잎을 만져보는 일이

이상하게도 나를 가라앉혔다.

나는 나를 돌보는 일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이렇게 사소한 반복 속에서 시작되는 것을 알았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 같진 않았지만,

이 작은 움직임들이 나를 완전히 무너지지 않게 붙잡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조금씩 나를 정리하고 있었다.

말이 되지 않던 감정들이 그 순간만큼은

조금씩 조금씩 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매일 기록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그날의 나를 겨우 붙잡아두기 위한
아주 작은 문장들. 글로 다 담기지 않는 날에는

다이어리를 꾸미며 말이 되지 못한 감정들을
다른 방식으로 흘려보냈다.

그건 거창한 변화가 아니었다.

그저, 하루를 버티기 위한 작은 선택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사소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 나를 살아 있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자존감은 늘

일상에서 시작된다.


나는 이제 살아가는 이유를

억지로 찾지 않는다.

완전히 괜찮아진 사람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를 버리고 사라지는 쪽은 선택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금은 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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