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
작년에 처음으로 유럽을 여행하고 온 뒤, 작은 꿈 하나가 생겼다. '동서남북 방향대로 유럽을 여행하고 기록하기, 그리고 북유럽은 퇴사 후 떠나기', 로망 같은 이 꿈은 현재 진행 중이다. 지난가을 동유럽 여행기에 이어서, 서유럽 여행기의 에필로그를 써내려 가고 있다.
여행의 시작, 파리행 비행기를 탑승하기 전, 인천공항 내 스타벅스 서점에서 우연히 집어든 책 한 권이 있었다. 《헤르만 헤세와 인생 산책》이라는 책이었는 데, 이런 표현이 있었다. '행복을 찾기 위해 떠나는 사람, 행복을 지키기 위해 남는 사람', 철새는 행복을 찾기 위해 떠나고 텃새는 행복을 지키기 위해 남는다. 당시에는 '나는 당연히 행복을 찾아 떠나는 사람이지'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철새이면서도 텃새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 여행은 '행복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한 유럽 여행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떠나기 전까지는 일을 하며 돈을 번다. 나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남은 시간들을 꿋꿋하게 살아간다. 행복을 찾아 떠나는 사람을 막을 길은 없다. 여행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다.
이번 여행은 처음으로 엄마와 단 둘이 떠난 여행이었다. 무뚝뚝한 모녀의 여정이 시작되었을 때, 걱정보다는 여행에 대한 설렘이 더 컸기에 시간에 몸을 맡겼던 것 같다. 비행기가 출발하고 시간이 흘렀을 때, 고민고민하다가 목베개를 엄마의 어깨에 살포시 대고 기대었다. 어른이 되고나서는 아마 처음이지 않았을까. 그렇게나마 마음을 표현했다. 자세를 다시 고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도 갑자기 나의 오른쪽 어깨에 기대었다. 놀란 티를 내지 않고, 엄마가 더 편할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 잡았다. 피로가 걷힐 만큼 몸이 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만은 편해졌다.
다행히 여행하며 크게 서로 기분이 상할 일은 없었다. 여행 초반에는 사진을 계속 많이 찍어드려야 해서 쉽지만은 않았다. 엄마는 사진을 정리하고, 프로필 사진을 꾸미고, 일상으로 돌아가서 그 사진들을 보는 게 삶의 낙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걸 떠올리며 여행 끝자락에 갈수록 최선을 다해 사진을 찍어드렸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누군가의 행복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 쓰였던 것 같다. "익스큐즈미" 하며 잠시 비켜달라고 하면서까지 순간들을 담아냈다. 말하지 않았지만, 엄마도 나의 노력을 아는 듯했다. 어쩌면 이 또한 나의 행복이 아니었을까.
흔히들 여행에는 끝이 없다고 한다. 이번에 여행하면서 '예술에도 끝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다 보니, 여행이 곧 예술 활동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양한 작품들을 보고, 그 너머의 이야기들을 들었다.
지난 동유럽 여행 때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일생을 듣고, 그의 유명 작품 《키스》를 감상했다. 이번에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 그림과 《밀로의 비너스》 조각상을 감상했고, 바티칸 박물관에서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천장화를 마주했다. 특히, 여행 내내 여러 조각상 작품들을 보았는 데, 예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듯 그 정교함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마치 예술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생긴듯한 느낌이 들었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가 있는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섰을 때는 한 사람이 이루어낸 예술의 위대함에 숨죽일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작품 앞에 나는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가 싶다가도, 이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걸작들이 존재할까 싶은 탐구심이 들었다. 이래서 여행이 필요한가 싶었다.
박물관이 아닌 길 위에도 예술은 있었다.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서는 반고흐, 모네, 피카소 등 당시 가난했던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상상하며 여행했다. 르네상스 발상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단테'의 생가를 방문했고, 돌아와서 단테의 《신곡》 세계관을 공부했다. 그 과정에서 단테의 롤모델이었던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작품도 접할 수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한참 뒤, 고전 문학을 좋아하는 직장 상사가 '베르길리우스'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때 당당하게 "알죠. 베르길리우스, 고대 로마 시인이었잖아요."라고 맞장구쳤다. 작지 않은 희열을 느꼈었다. 그 한마디로 여행을 통해 쌓은 지식은 무사히 일상에 닿았고, 여행의 의미는 짙어졌다. 여행은 예술적 교양을 쌓는 활동이다.
이번 서유럽 여행기의 제목을 《낭만과 현실 사이, 서유럽》으로 지은 이유는 여행에 변수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변수를 받아들일 줄 아는 여행의 태도를 배웠다. 여행에서 마주하는 변수들도 여행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에펠탑 유람선 투어를 하다 에펠탑 가까이 왔을 때 폭우가 극적으로 멈춘 행운을 맞이했을 때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순종 소식에 차질이 생길 뻔했지만 그날까지만 바티칸 박물관 입장이 가능했을 때도, 아말피 투어 때 폭우가 쏟아져서 그날 여행은 망한 줄 알았지만 유람선 출발과 동시에 비가 그쳤을 때도, 이 모든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이 여행을 더 여행답게 해 주었다.
심지어는 새벽 다섯 시 반 로마로 출발하기로 했던 여행의 마지막 날, 인솔자님이 연락두절 되어 인솔자 동행 없이 차가 출발하기도 했다. 패키지여행에서 일어날 리 만무한 그런 변수 또한 존재했으나, 그날 또한 여차여차 추억이 되었다.
우리의 인생 또한 낭만과 현실 사이를 걸어가는 여정일 것이다. 꿈꾸지만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 앞에 주저앉기도 한다. 변수를 잘 받아들일 줄 아는 태도로 살아간다면, 훗날 모든 것들이 과거의 시간으로 흘러가고 추억으로 남지 않을까. 여행하는 자의 태도가 인생에도 필요한 것 같다.
유럽은 내게 행복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자, 그리움의 대상이다. 여행하며 예술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느낀 후로는, 그곳에서 더 보지 못하고 온 것들이 많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계속 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사색하며 걷는 순간들이, 영감을 얻는 그 인생의 과정에 여행이 있었다.
이번 여행은 견문을 넓힌 이점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세상이 더 궁금해졌다. 예술과 역사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이곳을 단 한 번만 여행하는 것이 가능한가 싶었다. 이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볼거리와 이야깃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여행의 탐구심을 자극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여행은 영원보다는 순간에 가깝고, 그 순간을 어떻게 즐기는 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여행하는 그 순간이 영원할 수는 없지만, 한편으로는 영원히 여행하며 사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행은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품고 있고, 그 모험을 떠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여행하는 만큼 자신의 인생도 잘 채워나갈 수 있지 않을까.
또 다시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어디를 여행할지는 정하지 않았지만, 어디가 되었든 다 괜찮을 것만 같다. 이 이야기가 언제, 어디까지 흘러갈지 모르지만, 어떻게 나답게 즐기는지는 잘 아니깐, 시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려 한다!
만약 인생이 한 권의 역사책 이라면,
아마도 여행은 그 역사책의
가장 전성기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늠름하게, 화려하게.
모든 여행자는
자신의 역사책에 전성기를 쓰는 사람.
더 빛나는 전성기를 꿈꾸며
다시 모험을 떠나는 사람.
여행자는 그런 사람.
-'모든 요일의 여행' 책 내용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