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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수 May 14. 2024

자기객관화

우선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었다. 명확하게 현재 상태를 정의할 수 있어야 그다음 스텝도 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세 단계에 걸쳐 나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했다. 단계마다 내가 염두에 둔 목적이 달랐고, 실제로 느꼈던 점도 모두 달랐다.


내가 몰랐던 나 (금융자아)


불안감은 대부분 무지에서 비롯된다. 우선 그동안 덮어두었던 것들을 열어보고 마주하기로 했다 (계좌잔액과 카드내역). 고백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나의 총자산이 얼마인지 몰랐다. 한 달에 어느 정도 쓰는 지도 잘 몰랐다. 돈 걱정 없는 사람이라 그랬던 게 아니다. 단지 월급보다는 적게 쓴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한 달 고정비용도 몰랐다. 통신비가 얼마인지, 아직 넷플릭스를 구독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다. 은행 어플에 잘 들어가질 않으니 가끔 들어갈 때마다 액수가 크게 떨어졌었는데, 흠칫한 순간이 몇 번 반복되다 보니 나에게 은행 어플은 어느새 껄끄러운 존재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턴가 덮어놓고 쓰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아래 항목을 확인해 보았다.


- 총 자산

- 한 달 평균수입과 지출

- 한 달 고정지출과 변동지출

- 지출카테고리

- 계좌 현황

- 가지고 있는 카드종류

- 입사 이후 번 돈과 쓴 돈


총자산은 토스와 뱅크샐러드에 계좌를 모두 연결해 확인했고, 한 달 지출은 송금내역과 카드내역을 바탕으로 3개월치를 일일이 확인했다. 참고로 계좌내역, 카드내역, 간편결제 내역을 모두 확인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 중 한두 가지만 확인하면 지출내역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카톡 1/n 정산, 간편결제가 누락되거나 (계좌에서는 만원 단위로 출금되기에), 이체내역이 지출내역으로 합산되는 등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평소에 사용하는 지출수단을 모두 확인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이는 내가 주로 사용하게 되는 지출수단이 무엇인지 알기 위한 목적으로도 유용했다.


내가 돈을 쓰는 타이밍과 목적을 알기에 나는 내 방식으로 지출카테고리를 분류했다. 예를 들면 나는 회사 점심시간에 사 먹는 커피와 내가 개인적으로 카페를 갈 때 사 먹는 커피를 구분해서 계산했다. 나의 경우 이 둘은 목적이 달라 같은 커피값으로 분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 친목, 후: 자기계발). 이와 같이 명목상 같은 카테고리일지라도 내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분류했다. 참고로 이 과정에서 나는 엑셀을 이용했다. 주로 업무 목적으로만 엑셀을 썼는데, 나의 재테크 목적으로 엑셀을 쓰니 기분이 새로웠다. 회사짬이 나오기도 했다.


생각과 현실은 다를 때가 많다. 나의 경우 매달 고정지출과 변동지출이 반반이었다. 아무래도 자취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숨만 쉬어도 나가는 월세와 관리비가 있었고, 통신비, 교통비도 매달 많이 나갔다. 여행, 브랜드 의류 구매, 콘서트 등 변동지출도 많았다. 꾸준히 10만 원씩 나가는 항목이 있길래 봤더니 저번 계절에 산 스니커즈 할부값이었다. 그 스니커즈에 대한 감흥은 떨어진 지 오랜데 이번 달에 또 돈 낼 생각을 하니 짜증 났다. 생각보다 지금까지 모은 돈은 최악은 아니었다 (충격을 방지하기 위해 최악으로 상상함). 그러나 역시 계좌는 관리되지 않고 있었다. 첫 회사 퇴직연금, 만기된 예금과 같은 목돈이 방치되고 있었다.


지출카테고리에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식비였다. 나는 배달음식을 많이 먹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일주일 2번 주문이면 한 달엔 9번이었고, 벌써 20만 원이 넘어갔다. 외식비나 식재료비는 포함하지도 않은 돈이었다. 또 놀라웠던 것은 회사 안에서 돈을 많이 썼다는 점이다. 점심시간 커피값, 간식비, 가끔 나가서 먹는 점심 외식비를 합치니 회사생활을 하며 나가는 식비가 꽤 많았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조식, 중식, 석식을 모두 제공하는데 이 혜택은 거의 누리지 않고 있었다. 지출을 추가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확인한 결과가 어땠건, 지금까지 나에게 가장 큰 불안과 긴장을 주었던 것은 나의 덮어둔 계좌와 소비내역이었다. 결과와 무관하게, 내가 이것을 꺼내어 샅샅이 확인했고, 이제 내가 확인하지 않은 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안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얼마를 모았고, 한 달에 얼마 정도 쓴다는 가늠이 되자, 처음으로 내가 언제까지 어느 정도 모을 수 있겠다는 정확한 계산이 되었다. 이 계산에 초라한 마음이 들면서도, 지금이라도 현실을 알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나는 나의 금융자아와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 하나하나 파악해 가는 시간은 반성의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발전의 가능성을 확인한 시간이기도 했다. 틀어막을 수 있는 지출이 많아 돈 모으는 속도는 이제 더 빨라지겠는 데와 같은 초긍정회로가 가동되기도 했다. 또, 이런 결론은 예상치 못했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까방권도 주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각 지출의 의사결정 단계에서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각기 다른 가치판단을 따랐을 뿐이었고, 하나의 통합된 목표가 없었을 뿐이었다.


역사와 군중 속의 나


다음으로는, 역사와 군중 속의 나는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었다. 전지전능한 시점에서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2024년 기준, 내가 일하는 산업, 회사, 부서, 연차에 따른 현재 나의 연봉, 월급, 나의 학위, 학벌, 재능 등. 내 이름과 생일을 지우고 나를 보았을 때, 이 사람은 (나는)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어느 정도의 경쟁력이 있겠거니 가늠해 보려고 했고, 내가 지금까지 성취한 정도를 바탕으로 기대되는 미래를 예측해 보려 했다. 재테크에 눈을 떴다 해서 이제 대단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 설레발치지 않고, 나에 대해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나의 역량을 부풀려 생각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려고 했던 이유는, 철저히 현실을 반영해서 목표와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망상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었고 이제 열심히만 하면 잘 될 거라는 순진한 생각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내 기준에선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이다. 과거와 비슷한 유형과 수준의 노력을 하면서 더 대단한 것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혹은 반대로, 허황된 목표를 세우고 이에 부응하지 못해 좌절하고 싶지 않았다. 평소와 같이 열심히 하면 이 정도를 이룰 수 있겠구나는 가늠을 하고 싶었다.


- 우선 나는 전문직과 같은 기술자는 아니고 회사원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연봉과 보너스가 준수한 대기업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돈을 제일 많이 주는 회사는 아니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아직 산업의 세계적인 리더는 아니고 후발주자다. 내 결론을 요약하자면, 세계 최고 인재들이 실무를 하러 오는 회사는 아니다. 내가 졸업한 학부도 평범하다. 와 소리 나오는 학교는 아니고 나는 대학원도 가지 않아 학교에서 전공 전문성을 쌓았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 이 정도가 나의 경쟁력을 간편히 설명해 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열거한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만, 스스로에 대한 개인적인 판단은 배제하고자 이와 같이 생각해 봄).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평범한 경쟁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나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고 한 시도와 나의 포부와는 무관했다. 구태여 차분해지기 위한 방법이라고 보일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내 기는 오히려 더 타올랐다. 직장인 군중 속 평범한 OOO 대리 (나)가 원하는 수준의 재무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나대고 도전해야지만 하는지 가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X많이). 여기에,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게 아니고 더 나은 전략이 필요했다. 내게 부족한 게 뭐였을까? 열심히의 절대적인 수준? 정보? 운? 지능? 뭐가 되었든, 더 큰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옆에서 본 나


제삼자의 시각으로 바로 옆에서 나를 보면 어떨까도 궁금했다. 사실 이 관점을 추가한 것은 PT를 받던 중 헬스트레이너 선생님과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라서였다. 그는 20대 중반의 남자였는데, 간절한 꿈은 뮤지컬 배우였으나 뮤지컬 전공이 아니고 관련 인맥이 없는 등 여러 현실의 벽에 막혀 포기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는 뮤지컬을 보러 가는 것에만 만족하고 있다고 한다. 코인노래방에서 촬영한 아이폰 속 수많은 영상, 라면만 먹고살아도 좋으니 아직도 뮤지컬을 하고 싶다는 쌤의 거듭된 말씀에 나는 '쌤, 그런데 어디까지 시도해 보신 거예요'라는 질문이 목 끝까지 차 올랐다 (T).


업계의 전문적인 벽과 그 자리에서 다 들을 수 없었던 그의 노력을 폄하하려는 의도로 이 썰을 푸는 것은 아니다. 남의 일로 생각하면 '여기까지는 해 봐야 되는 거 아닌지'라고 기준을 높이기 마련인데, 내 일에 한해서는 미적지근한 태도와 지지부진한 성적에도 자애로워질 수 있는 스스로의 불일치를 깨달은 것이었다. 또한 나는 그가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해 행하는 그 어떤 행위도 진심으로 응원해 줄 자신이 있었다.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걱정이 되어 안 하게 되는 것들이 많은데, 사실 남들은 내가 뭘 하든 관심이 없고 열정이 담긴 행동이라면 응원해 주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할 다양한 도전에 대해서 제삼자의 시각을 유지하기로 했다. 돈을 불려보고자, 조금 더 벌어보고자 하는 그 어떤 도전에 있어 괜히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거나 부끄럼을 타지 않기로 했다.




주로 다부진 마음에 대해 썼지만,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주 초라해진 것이 사실이다. 아직 이만큼 밖에 돈을 모으지 못했구나, 한 달에 이 정도밖에 쌓이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에 여러 번 착잡해졌다. 그렇지만 나는 자기객관화는 자기비하와 다르고, 현재의 나의 상태가 미래의 나의 잠재력까지 규정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려 했다.


초라함에 과도하게 젖어드려는 순간이 몇 번 있었다. 그 상황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여러 번 찾아왔지만 파도를 타듯 자연스레 넘어가려 했다. 신기하게도 초라한 마음과 피하고 싶은 마음은 처음 인지한 순간에만 찾아들었고, 그 이후엔 '이미 알고 있는 나'를 더 이상 괴롭히지 못했다. 나는 이 순간을 잘 기억해 두려 했다. 나중에 찾아올 다른 종류의 초라함 들도 이렇게 넘어가면 된다는 것을 기억해 두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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