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로리 Mar 22. 2024

자기만의 공간

빈 서점 일기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공간이 존재한다. 그 공간이 없으면 사람은 외로워지기 십상이므로 크던 작던 숨 돌리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은 필요하다. 집을 나만의 공간으로 꾸며야겠다고 꿈꿔왔던 적이 있었으나 그 공간은 남편의 옷들과 아이들의 장난감, 인형으로 채웠고, 한 켠에 마련된 작은 서재에도 혼자 있기보다는 가족들의 공부방 같은 공간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쯤에 일순 '독립서점'이 나만의 공간으로 딱이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조용한 공간과 여유로운 음악,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 안전한 곳. 거기다가 우리 집의 서재보다는 몇 배나 많은 책들이 반갑게 인사하는 곳. 그런 곳을 일주일에 한두번 들렸다오면 친구와 수다떨지 않아도, 백화점에 가 쇼핑을 하지 않아도, 이내 마음이 괜찮아졌다. 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공감가지 않는 얘기일지도 모르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서점을 가야 힐링이 된다는 말을 이해할테다.


집에서 걸으면 10분만에 갈 수 있던 곳. 하지만 서점으로 가는 길은 빠른길을 선택하기보다 주변을 산책하듯 걸어 시간을 쓸 때 더 좋았다. 어떤 날은 자전거를 타고 쌩 달려 서점에 도착할 때도 있었지만 서점으로 향하는 여러 갈래길 중에 호수를 빙 둘러가는 길을 택한 날이면 따사로운 햇살과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이 보여주는 윤슬을 보며 감탄하다 넋 놓고 삼십분 쯤, 또 시간을 빌려줬다. 흔들리는 그네벤치에 자리가 생기면 그곳에 앉아 사색을 할 수도 있었다. 계절과 날씨가 변하는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어느 순간 도착한 서점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듯한 모습으로 반기는 것도 좋았다. 카페에서 풍기는 커피냄새보다, 편집샵에서 풍기는 디퓨저냄새보다 차분하고 익숙한 책 냄새가 나던 곳. 그 곳에서 몇 해동안 나는 행복했다. 서점에서는 나를 단순한 손님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좀더 친근하게 대해줬다.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전에, 내가 창문에 붙어서 반갑게 인사하면 서점 사장님도 방긋 웃으셨고 언제나 집에 갈 때에는 손수 문을 열어주며 상가 앞 길목까지 나와 배웅을 해주었다. 무얼 사지 않더라도, 그냥 수다가 그리운 순간에도, 독서모임이나 글쓰기모임으로 간 것이 아니더라도 작은 손길에 대접받고 있음을 느꼈다. 


좋아하는 서점이 3주 동안 문을 닫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어느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3월.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학기의 시작을 다짐하던 봄의 초입에 서점 공지사항에 올라온 글은 왜 내게 '시작'이라는 느낌보다는 '끝'일 것 같다는 느낌으로 다가왔을까.

'31일까지 독서여행을 떠납니다.
돌아와 더 나은 공간과 이야기를 준비하겠습니다.'


멍했다. 가까이에서 이 서점을 지켜본 자로써, 정기휴무날인 일요일과 월요일을 제외한 날에 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설날이나 추석연휴에도 열어두셨다는 말을 서점 사장님께 들었던 적이 있다. 문득 작년 가을에 좋아하던 카페가 없어졌던 게 생각났다. 유동인구가 별로 없는 곳에 있던 카페. 젊은 사장님의 패기로 동네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지던 곳이었다. 한나절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 적도 자주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그 공간엔 카페 사장님과 나뿐인 적도 많았다. 손님이라고 해봐야 테이크아웃 커피 몇 잔 정도. 나는 이 공간을 나 혼자 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내심 좋았다. '역시 나는 마이너틱한가 봐. 이 좋은 곳을 사람들은 왜 안 오는 걸까?'하고 생각하면서도 손님들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으면 했다. 이기적이게. 그러던 카페가 일주일에 몇 번씩 문을 닫아두는 일이 생기더니 어느 날 카페간판은 사라지고 여성옷가게로 바뀌어진 것을 보게 되었다. 길을 스쳐지나가던 카페 사장님은 "잠깐 쉬려고요. 다시 돌아올 거예요."라고 말했었지만 해가 바뀌고 봄이 된 지금까지도 그곳에는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옷들이 옷걸이에 걸려있다. 


자영업자들에게 그 공간을 지켜낸다는 것은 분명 매출과 상관있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공간을 포기하고 조용히 떠난 이를 나 같은 단골손님 한 명이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인 것도. 그럼에도 그 카페가 없어지고 나서 후회를 했다. 카페 사장님께 여기 커피만큼 내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곳은 없다고 고백할걸. 이곳에 있으면 글이 잘 써진다고, 사실은 아지트 삼고 싶다고 더 솔직해질걸. "사장님의 잘생긴 얼굴이 이곳을 오는 이유에 한몫 거드는 거 아시죠?"라고 웃겨드릴걸... 나는 부끄러움에 내뱉지 못했던 수많은 말들을 떠올리며 내가 좋아하던 (사라진) 카페와 어쩌면 (사라질 수도 있는) 이 서점을 겹쳐 놓고 불안에 떨고 있다.   


"서점 몇 주 닫는다고 무슨 일 나겠어요?"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카페보다 더 유지하기 힘든 곳이 독립서점이지 않을까? 카페는 대중적이고 이제 커피는 사람들이 물보다 자주 마시기도 하니까. 하지만 여전히 책은 그렇지 않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소수고, 서점에서 책을 사는 사람들은 더 드물다. 내가 좋아하던 카페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간판이 뜯기고 집기와 가구들이 사라지는 것을 본 내게, 독립서점 사장님의 3주간의 임시휴무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헤어짐부터 먼저 예상하는 것이 섣부를 수도 있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번엔 후회하지 말자, 그게 소심한 한 손님의 다부진 다짐이었다.  



정선 : 사장님, 안녕하세요. 3월달 서점 쉬어요?

서점 : 안녕하세요 정선님. 좋은 아침이에요. 네. 서점은 그러려고요.

정선 :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서점 가려고 했는데 임시휴무라고 쓰여있는 게 왠지 마음에 걸려서요.

서점 : 아 오시려고 했는데 너무 죄송하고 아쉬워요.

         휴무는 순수하게 집중해서 책을 읽고 싶어서 결정했어요.

         이번 독서모임 책들이 워낙 두꺼워야지요. 하하하.(웃음) 


정선 : 큰 결정 응원해요. 그러면... 무례한 부탁일 수도 있지만,

        사장님 안 계시는 동안 제가 서점에 있어도 되나요?

        서점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면 저도 집중이 잘 될 것 같아요. 제가 서점도 지키고요.

서점 : 정선님이 응원 주시니 걱정 없어요. 감사합니다.

         서점 키 복사해 둘께요. 그럼 내일 10시에 들려주시겠어요?



난감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가능치 않은 일이다. 서점 키를 내게 준다는 것은 이곳에 있는 책들과 나머지 것들을 내게 맡긴 거와도 같으니. 책임의 문제도 뒤따른다. 혹여 손님인 내가 물건들을 훔쳐가거나 고장 난다면 그 문제들은 어쩌려고 말인가. 서약서라도 써둬야 할까?라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그 고민에 대해 사장님께 말하자 "서점키를 맡긴다면 그것도 제가 감수해야 하는 것이지요."라고 답했다. 오 하느님. 서점 사장님은 지금껏 쉰 적 없었는데 모처럼 여유가 생겼다고 좋아하셨다. 나 혼자 괜한 걱정을 한 것은 아닌가 하고, '오지랖도 병이라던데 이건 또 무슨 약을 먹어야 할까.' 생각했다. 그래도 빈 서점 안에 누군가 있다는 느낌이 들면 적어도 바깥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은 문 닫힌 느낌은 아닐 것이다. 비록 유리창에는 '임시휴무'공지문이 붙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끝이란 느낌은 들지 않도록. 난 이제부터 서점을 지킨다. 사장님이 없으면 그 가게는 분명 티가 난다던데, 그러지 않도록 매일 서점으로 와 불을 켜고 먼지를 털 것이다. 당분간 아무도 쳐다보지 않을 책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낼 것이다. 그러면 책들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곳에서 외롭지 않았던 것처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