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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로리 Mar 30. 2024

고독에도 필요한 등불

빈 서점 일기

빈 서점에서의 시간은 하염없이 느리게 흘렀다. 아무도 없으니 입술은 언제나 다물고 있었고, 입 안이 건조해질 참이면 마른기침을 하다가 물을 끓여 마셨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무언가라도 해야겠다는 약간의 부담감은 손가락과 머리를 바쁘게 움직였다. 매일 몇 줄이라도 쓰려고 했고, 가져온 책도 집중해서 읽었다. 그러다 집중이 흐트러질 때면 혼자서 서점 안의 책들을 살펴봤는데, 그러다 멈칫거리게 만드는 책이 보이면 조심히 꺼내 책의 서문을 읽었다. 생각해 보면 서점 주인이라고 해서 책들을 함부로 꺼내 읽을 순 없었다. 책들은 결국 누군가에게 팔아야 할 물건이므로. 그렇다면 서점 주인이야말로 사장님인 동시에 단골손님이겠다. 하루에도 쏟아지는 책들 가운데 관심을 가지지 않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서점 사장님이 책장에 진열해 둔 책 중 <세상 끝 등대 : 바다 위 낭만적인 보호자>라는 책에 눈길이 갔다. 쥘 베른의 소설 <세상 끝의 등대>를 인용하며 등대를 수집하고 정보를 모아 글을 썼다고 적혀있었다. 삽화까지 직접 그렸다고 하던데 그래서인지 책은 비닐에 감싸 있었고 나는 더 궁금해졌다. 안을 들여다보고픈 마음에 사장님께 메시지를 보내 “서점에서 사고 싶은 책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참에 카드 결제기도 가르쳐 주실래요?”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그분의 소중한 자유시간을 해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사고 싶은 책이 있으나 살 수가 없다. 서점은 임시휴무 중이다. 기다림은 너무 길다.

결국 아무리 생각해도 별다른 방책이 생각나질 않아 메모지를 꺼내 마음을 담아 용건을 적었다.


"서점 사장님께.
이곳에서 있으면서 읽고 싶은 책들이 생겨나는데
서점이 오픈할 때까지 책표지만 보고 있을 순 없어서
돈은 나중에 드리고 책을 훔쳐갑니다.
아래는 외상목록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무튼 메모를 작성하고 화끈하게 책 비닐을 뜯을 때의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난생처음 외상이라는 것을 해보다니. 그것도 책 때문에! (그 후로 하루하루 지날수록 외상목록에 쌓여가는 책들은 늘어났고, 서점이 다시 문을 열면 내 신용카드 결제 내역도 늘어날 것이 문제 이긴 하다.)    


책 <세상 끝 등대>는 읽을수록 '등대'와 '서점'의 맞닿은 상황들이 비슷해 보여 씁쓸한 마음도 같이 술렁댔다. 등대는 여전히 가동 중인 것들도 있지만 중단된 등대가 더 많고, 그마저도 새로운 해상 신호기들이 생겨나면서 곧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묵묵히 외로운 바다에서 홀로 불을 밝히던 등대지기도 이제는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단어가 되었다. 바다를 떠다니는 선박들은 더 이상 등대의 낭만적인 보호가 필요 없어졌다. 어찌 보면 세상은 인간들의 편의를 위해 빠르게 바뀌고 있다. 그러면서 서서히 낙오되고 고립되는 것들도 생겨난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그래서 슬픈 일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고독 속에서 견디며 버티는 것이라.


서점은 개인의 의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서점도 언젠가는 사라질까? 나는 그런 날이 오지 않길 바란다. 몇 남은 등대지기처럼 내가 사는 동네에 몇 남은 서점지기들이 고독하지 않도록. 그래서 나는 오늘도 빈 서점을 지킨다. 등대지기처럼 불을 밝히며 이 시간들을 가치롭게 여길 것이다.




:: 에필로그 ::

언젠가 서점 사장님과 나눈 대화를 덧붙인다.


정선 : 서점에 있는 책들 중에는 몇 년을 두어도 안 팔리는 책들이 존재하잖아요. '재고'라는 말이 어울리진 않지만 어쨌든 책방을 하면서 재고가 계속 쌓이면 서점 주인들은 어떤 느낌이 들까요?


서점 : 제 경험과 생각을 빗대보면요. 어쨌든 그 책은 제가 골라서 들여온 책이니까 감정이 좋을 순 없을 것 같아요. 서점에 있는 동안 책들은 매일 저에게 무언의 메시지 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들의 가치를 나눴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책에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다라면... 책에게 계속 말을 걸어야죠. '너희는 각자 가치를 가진 책들이고 언젠가는 그 가치가 적절한 곳에 닿는 때와 장소와 사람이 있을 거야. 가치는 변하지 않는 거니까. 너희나 나나 똑같은 운명이야. 우리의 가치를 알아봐 주길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보자.'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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