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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로리 Mar 29. 2024

열고 닫는 일

빈 서점 일기

다음 날 아침, 사장님을 만나 정말로 서점키를 받았다. 급히 복사해온 열쇠는 서점과 어울리지 않는 열쇠고리가 걸려있었다. 굵직하게 적혀있는 OO열쇠 연락처가 달랑이는 키를 받으며 갑자기 어안이 벙벙했다. 서점이 쉬는 것을 아쉬워하는 손님이 전날 술이라도 취해 무턱대고 내뱉은 말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푸념을 늘어놓았다 한들 사장님은 손님에게 서점을 내어 줄 의무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사장님은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무엇하나 허투로 듣는 일이 없었다. "키 받았으니 서점 한 번 열어보시겠어요?"라는 사장님 말에, "쑥스러우니 혼자 있을 때 해볼게요."라고 답했다. 무안해서 지문하나 묻어있지 않은 투명한 서점 유리문을 잠깐 쳐다봤다. 열쇠 구멍은 오른편 바닥 쪽에 있고 열쇠는 넣어 돌려따면 된다. 잠깐 시간이 멈춘 것 같기도 했다.


서점 키를 쥐고 멀뚱하게 서있는 내게 사장님은 왜 갑자기 서점 문을 닫고 이런 과감한 일을 저질렀는지 설명해 주셨다. 이게 모두 독서모임 때문이었다. 모임을 진행하고 모임에 진심이며, 책을 읽고 발제문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누구보다 정성들여 하는 분이 바로 이 서점의 사장님. 시즌제로 회차가 거듭되는 동안 아마 좀더 완벽한 모임이 되길 바라셨던 것 같다. 서점에 방문하는 손님들도 그에게는 중요할테지만 그보다 인연을 좀더 중시하는 그분께는 독서모임 회원들에게 양질의 모임을 선사하고 싶으셨는지, 아무튼간에 (이게 무슨 논문도 아니건만) '독서여행'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사업장이 아닌 그만의 공간으로 떠나시는 거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사장님은 곧 떠날테지만 곧 돌아오실 거다. 암. 


생각보다 서점을 지키는 일에 인수인계받을 것은 없었다. 서점에는 당분간 책이 배송되지 않을 거고 임시휴무 공지를 놓친 손님들이 어쩌면 서점 문 앞까지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닫혀있는 문을 열어볼 일은 없다. 서점의 전등은 켜고 싶은 만큼. 내가 원하는 조도에 맞춰서 전등을 전부 켜도 상관없다고 했다. 지금껏 이 공간을 수도 없이 많이 왔었지만 책장 안에 꽂힌 책을 보는 것이 아닌, 벽면의 전등 스위치를 보고 있는 것은 새로웠다. 내가 좋아하는 전구색 샹들리에 조명은 제일 아래 스위치였다. 당분간 서점 문은 닫혀있겠지만 서점 안의 전등은 켜져 있을 것이다. 매일 내가 그렇게 할 것이다. 사람들은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할지도 모른다. 궁금해서 안을 들여다본다고 하면 더 좋겠다. "정선님, 이곳에서 책 보고 글 쓰실 거라 하셨죠? 그럼 무드가 빠질 수 없겠네요." 사장님은 서점에서 쓰는 스피커 사용법을 알려줬다. 아직은 켜지 않은 음악때문에 서점은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어색했다. 서점엔 이제 내가 켜놓은 음악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울려퍼졌다. 하얀 테이블보를 두른 테이블 위에 2개의 커피잔과 잔받침을 마주 보게 내려놓고 이제야 우리는 따뜻한 럼배럴커피를 따라주며 홀짝 마셨다. 더이상 대화는 없었다. 서로를 마주보지도 않았다. 잔을 내려놓는 소리 조금, 신뢰의 미소 조금만 느껴질 뿐이었다. 조금 뒤 서점을 잘 부탁드린다고 연신 인사를 하며 우리는 헤어졌다.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사장님이 서점을 떠나고, 나는 서점에 남아 사장님을 배웅했다.   


서점이라는 공간을 선물 받았다. 무엇부터 해야 하지? 아직은 생각이 떠다니고, 마음처럼 서점이 편하지 않다. 이 공간에 혼자 남아있던 적은 처음인지라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시간은 벌써 오후 5시. 이제는 마셨던 커피잔을 설거지하고 집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빈 서점에 있으면서 지키려고 했던 것 중 하나는 매일 같은 시각에 불을 켜두는 것. 그러려면 나만의 출퇴근 시간을 정하는 것이 필요했고, 서점 내부의 어떤 조명을 켜둘지에 대한 고민도 이어졌다. 하지만 모든 고민의 결정 또한 나뿐이라 선택은 쉬웠다. 나는 이 서점의 샹들리에 조명을 좋아하므로 다른 조명 스위치는 거들떠보지 않고 샹들리에 조명만 켰다. 서점 중앙에 위치한 샹들리에 조명은 총 3단으로 되어 있는데 제일 위칸에 5개의 주황조명으로 시작해서 밑으로 내려갈수록 그것의 배수만큼 반짝임이 웅장해진다. 하여 총 30개의 빛이 가려둔 커튼을 통과하여 바깥으로 생존을 밝히는 중이다. 


서점은 매일 10시 열었다. 사장님이 주신 키를 오른쪽으로 돌려 홀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잠자던 책들이 나를 반겼다. 황보름 작가님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에서 보면 서점지기 영주가 오픈시간에 서성이고 있는 손님을 마주하며 이런 말을 건넨다. "밤새 냄새가 좀 뱄을 거예요. 밤 냄새랑 책 냄새요. 그래도 괜찮으시면 들어와서 보세요." 라고. 나는 이제 매일 그 감각을 느껴보려고 한다. 책방에서만 맡을 수 있는 귀한 냄새. 책에 배어있는 글자의 채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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