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 태어나서 '핑크'를 한 번도 좋아하지 않은 경험은 아마 드물 것이다. 우리의 어렸을 적엔 (부모님의 말만 믿고 '내가 항상 예쁘다'라고 생각했었을 유치원 시절엔) 여자아이라면 누구나 핑크로 온몸을 치장했다. 공주들에겐 핑크 드레스가 가장 잘 어울린다는 룰 같은 게 있었으니까. 초등학교 저학년 때 각진 책가방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자기 몸집만 한 각진 가방을 등 뒤에 메고 있는 꼬마들의 등굣길은 항상 거북이 행렬을 이뤘다. 나는 아직도 등굣길의 내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때만이 유일하게 내 '핑크색 가방'을 뽐내며 걸을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길은 나의 런웨이였다. 핑크색 가방에 핑크색 신발주머니, 옷차림은 말할 것도 없이 프릴이 달린 공주풍으로 입고, 하얀색 타이즈에 예쁜 구두를 신고 사뿐사뿐. 콧노래가 절로 나오던 아침의 상쾌한 시간. 내가 누릴 수 있는 핑크색은 바비인형의 옷장문을 연 것처럼 늘 화려했다. 하지만 그런 시절은 신데렐라에게 걸린 마법의 시간처럼 오래가진 못했다.
중학생이 되면 더 이상 핑크의 마법은 통할 수가 없다. 우리 때에는 귀밑 3센티 짧은 단발머리를 해야 했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체크무늬 헐렁한 교복을 입고, 여름에는 흰색 양말, 겨울에는 검은색 학생용 타이즈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단정이 생명인 중학생 신분의 딸에게 이제 더 이상의 멋 부림은 없다, 라는 의미였는지 엄마는 그 후로 무난한 색상의 옷과 가방만 사주셨던 것 같다. 하긴 예전처럼 공주풍으로 꾸미고 다니기엔 더 이상 귀엽지 않은 얼굴과 커버린 키, 진해진 눈썹이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일 나이이기도 했다.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다. 무난한 것들은 이렇다 할 단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예쁘지 않았으므로 나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초등학교 때보다 더 최근임에도 말이다.
'교복에도 핑크로 꾸밀 수 있어! 난 튈 거야. 튀고 싶어.'
같은 반 남자아이들에게 관심받고 싶었던 나는 용돈을 차곡 모아 종종 친구들과 함께 시내로 쇼핑을 갔다. 이전까지는 내가 사는 동네 이외에 어디론가 나가본 적도 없었는데, 버스를 타고 40분 가까이를 이동해 가야 한다는 것은 내게는 꽤나 큰 모험이자 반항이기도 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친구들이 데리고 간 곳은 늘 신세계 같은 곳이었으므로 나는 늘 용돈 이외에도 일하고 온 엄마의 고단한 다리를 밟아주며, 늦은 저녁 출출해하는 아빠에게 라면을 끓여주며, 돈을 타냈다. 예쁜 액세서리, 헤어핀, 끈 달린 가방, 집 근처 문방구와는 종류부터가 다른 귀여운 헬로키티 문구류. 반짝반짝 화려한 조명에 빛나는 예쁜 옷들까지모두 있는 그곳은 나에게 다시 핑크 세상이 열린 듯했다.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갈 때 나는 마침내 마음에 드는 책가방을 메고 다닐 수 있었다. 딸기 우윳빛 연핑크색 쌈지 책가방이었다. 학교 다닐 맛이 났다. 헐렁했던 교복도 줄여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로 더 많이, 더 자주 시내버스를 타고 핑크색이 있는 그곳으로 나만의 일탈을 즐겼다. 핑크색 립스틱을 샀고, 핑크색 캔버스 운동화를 샀고, 겨울엔 교복 위에 입을 연한 핑크색 떡볶이 코트를 샀다. 엄마는 어디 가서 어울리지 않는 것만 골라 사 온다고 잔소리를 해댔지만, 내 눈엔 핑크는 예쁘고 나를 제일 잘 표현해주는 색깔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은 나에게 ‘핑크공주’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핑크로 인정받았던 때다. (물론 이제야 생각해보면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에 좋은 의미가 담겨있을 리 없지만)
피씨방에 처음 발을 들였던 날, 나의 닉네임도 결국 ‘핑크공주’가 되었다. 학교를 마치면 친구들과 피씨방에서 채팅을 했다. 이성에 눈뜨기 시작할 때 얼마나 많은 남자들과 온라인상에서 대화를 해봤던지, 어쩔 땐 같은 반 남자 친구들 사이에서 내 아이디를 가끔 듣기도 했었다.
“야, 어제 핑크공주 걔 말하는 거 엄청 귀엽지 않았냐? 빨리 만나고 싶어! 토요일에 광장 앞에서 보기로 했는데 뭐 입지? 정장 입고 갈까? 나이 들키면 안 되는데, 17살이라고 뻥쳤는데. 큭큭...”
처음에 나는 수줍음에 피식거릴 수 있었지만, 고개를 돌려보고 나선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아이디가 '테리우스'였으나 얼굴이 테리우스가 아님을 들키는 것처럼, 나도 '핑크공주'였으나 결국은 그 아이들의 환상 속 핑크공주가 아닐 테니까. 창피했을 토요일이 오기 전에 나는 그 아이디를 접어야 했다. 현실을 절실히 알게 된 날이었으니.
그 후로 닉네임은 즐겨보던 만화 <보노보노>의 등장 동물인 '포로리'로 정체를 숨겼다. 언젠가 다시 핑크의 마법이 통한다면 나는 핑크공주로 돌아가리라 다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