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해? 아무것도 안 하면 나와. 아이스크림 사줄게.”
이 말은 세상에서 제일 부드러운 말이다. 나는 커피 마시자는 말에는 상황에 따라 가끔 거절하기도 하는데 이상하게도 아이스크림이란 말은 마음을 사르르 녹이는데 일가견이 있어서 거절하기 힘들다. 분명 차가운 몸뚱이인데 한 입 베어 물면 바로 기분을 좋아지게 만드는 마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에는 초콜릿과는 다른 낭만들이 있는 것 같다.
달콤한 아이스크림
어릴 때 우리 집은 특별하게 간식거리를 사 먹지 않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예외인 날들이 있었는데 부모님은 저녁을 과하게 먹은 날이면 산책 겸 운동을 하자며 동생과 나를 부추겼다. 그렇게 부모님을 따라서 공원 한 바퀴 같이 돌은 날이면 아이스크림을 하나 얻어낼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르는 슈퍼는 언제나 설레었던 것 같다. 어릴 때에는 더블 비얀코를 좋아했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딸기 시럽이 뿌려져 있는 것을 다 베어먹고 나면 제일 좋아하는 샤베트가 나왔다. 같이 들어있는 작은 숟가락으로 한 입씩 떠먹을 때마다 엄마가 언제 또 사줄지 몰라 줄어드는 걸 아쉬워하며 먹었다. 그다음으로 좋아했던 아이스크림은 월드콘이었다. 하지만 월드콘은 아이스크림 콘의 끝부분에 들어있던 원뿔 모양 플라스틱 커버를 잘못 뜯으면 초콜릿 과자가 부서지는 참사가 발생하여 마음이 상하는 날도 있었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올라가며 용돈을 받기 시작하면서 나도 스스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쯤 유행했던 아이스크림은 슈퍼에 파는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배스킨라빈스 31’이었다. 그때의 배스킨라빈스 간판이 아직도 기억난다. 흰 바탕에 숫자 31만 핑크색으로 보였던, 주말에 교회 예배를 마치고 친구들과 갔던 처음의 기억이.
무엇이 맛있는지 몰라 아이스크림들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이름은 또 왜 이렇게 낯설고 어려웠는지. 혹여 친구들 앞에서 이름을 틀리게 말할까 봐 여러 번 마음속으로 연습하며 점원에게 주문을 했던 기억도 있다.
그때의 광고 카피라이트로도 쓰였듯이 배스킨라빈스는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곳이었다. 슈퍼에서 사먹는 아이스크림보다는 많이 비싼 편이었지만 그만큼 그 시간을 누리면서 먹으면 되었다. 힘들었던 평일의 스트레스를 주말의 아이스크림 하나로 다 잊어버렸다는 것은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먹는 순간에 나쁜 기억이 난 적은 결코 없으니 아이스크림은 행복의 물성임이 틀림없다.
종류가 많아서 골라먹는 재미를 느끼려면 우선은 맛을 알아야 가능했었는데, 배스킨라빈스는 늘 어린아이들에게 친절했다. 아이스크림을 가리키며 “이거 한 번 먹어보고 싶어요.” 하면, 핑크색 스푼에 한 숟가락 떠주며 상냥한 웃음도 함께 건넸다. 아이스크림 한 스푼으로 소소한 행복을 채워가던 때다.
내 생일은 여름의 끝자락이고, 31일이다. 생일 케이크로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선물 받는 경우가 많았고 생일이 아니어도 매월 31일은 배스킨라빈스에서 하는 이벤트 ‘31 DAYS’라는 가 있어서 그날 단 하루는 5 가지 맛을 담을 수 있는 패밀리 사이즈를 6가지 맛을 담을 수 있는 하프갤런으로 같은 가격에 사이즈 업해줬다. 아이스크림 하나에 매달 말일은 달콤한 행복을 핑크색 끈으로 묶어 가져 갈 수 있는 날이었다.
행복을 핑크색 끈으로 묶어 가져가는 날. 31일
배스킨라빈스에서 내가 좋아하던 맛은 오레오 쿠키 앤 크림, 아몬드 봉봉, 체리쥬빌레, 레인보우샤베트였다. 전부 친구들이 좋아했던 아이스크림을 따라 먹으며 나도 좋아하게 된 경우다. 여전히 배스킨라빈스의 서른 한가지맛을 전부 먹어본 적은 없다. 이제는 연락도 안되는 친구들이지만 오레오 쿠키를 씹으며 행복해했던 친구의 표정, 아몬드는 싫어하지만 아몬드 봉봉은 먹었던 친구의 무안한 웃음, 체리쥬빌레의 체리는 특별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던 당당함, 레인보우샤베트의 새콤함에 오만가지 찌푸림을 지으면서도 매번 그것만 시켜먹던 모습들이 그 아이스크림을 주문할 때마다 생각나기 때문이다.
뉴욕 치즈케이크와 민트 초콜릿 칩을 좋아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다같이 먹어야 하는 경우에는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배제시켜야 하는 아이스크림의 부류이기도 했다. 특히 민트 초콜릿 칩 같은 건.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래서 아쉬웠다기보다는 누군가가 좋아하던 아이스크림을 기억하며 배려했던 젊은 날이 멋지다는 느낌이 든다. 예전에는 친구들의 집 전화번호며, 주소, 핸드폰 번호도 모두 외우고 다녔기 때문에 아이스크림 취향까지 외우고 다녔을까?
당신은 친구가 좋아했던 아이스크림을 기억하나요?
작은 순간들을 축하하고 함께 기뻐하며 먹었던 차가운 아이스크림만큼 달콤한 추억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