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하늘 아래 똑같은 핑크는 없다.

숨은 핑크 찾기

by 포로리

종종 심심할 때 시간을 때우러 가는 곳이 두 곳 있다. 한 군데는 집 근처의 서점이고, 한 군데는 올리브영이다. 두 곳을 가는 이유는 재미있기 때문인데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서점의 책 코너에서 겉 커버가 핑크색인 책들을 관찰해본다. 굳이 핑크색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색이라 나는 핑크 색깔의 책들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다. 책들마다 핑크의 색감은 전부 다른데, 어떤 것은 육아서적이고 어떤 것은 여행서적, 그리고 대부분은 마음을 달래주는 에세이다. 요즘에는 뇌과학책 중에서도 커버가 핑크색인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무슨 이유 때문에 굳이 핑크색을 입혔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면 나는 책을 펼쳐 목차를 본다. 저자의 마음이 어땠을지, 전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읽다 보면 마음이 스르르 열리는 책을 발견하기도 한다. 책을 사는 기준은 대부분 나의 관심사나 독서취향과 관계가 있지만 가끔 이렇게 책을 사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건 또다른 재미라고 볼 수밖에 없다. (덕분에 내 서재의 책장에서도 분홍빛 봄의 기운이 느껴지는 건 감사한 일이기도 하고)


내 책장에 있는 핑크색 책들



올리브영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화장품 코너의 색조 라인을 구경하는 것은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아 신기한 곳이기도 한데, 특히 립 제품에는 수많은 색의 핑크가 존재한다. 남자들의 시선에서는 똑같아 보이는 색깔이 미묘한 차이로 진열장에 쏟아져있다. 핑크 1호, 핑크 2호, 핑크 3호가 아닌 각각에 이름 붙여 놓은 것들을 살펴보면 귀여워서 웃음이 나온다.






어떤 회사의 립 틴트에는 복숭아꽃, 히비스커스, 생장미, 베리 벨벳, 쥬스, 포멜로 듀, 앵두, 아침 무화과 같은 이름으로 색이름이 적혀있다. 꽃과 열매를 직접 빻아 붉게 만들었을 것 같은 침이 고이는 핑크빛이다. 다른 쪽에는 좀 더 우아하게 이름을 지어놓은 곳도 있다. 핑크 모먼트, 헤이지 피치, 로즈, 플로럴 핑크, 솔라 핑크, 모브 업, 발레리나 같은 이름. ‘이곳은 핑크의 무드를 중시하는 곳이겠지?’ 하며 마음에 드는 몇 개를 꺼내 손등에 살짝 테스트해본다.


하지만 더 재미있고 기발했던 립 틴트는 ‘척 시리즈’가 붙어있는 곳이었다. 이곳의 핑크색 계열은 거의 스무 가지나 된다.

수줍은 복숭아 인척, 발그레한 딸기 인척, 앵두요거트크림 먹은 척, 비밀 많은 자몽인 척, 무화과 퓨레인 척, 체리 크러쉬인 척, 핑크 레몬 피즈인 척, 리치 샹그리아인 척, 구아바 모히토인 척, 플럼 마티니인 척, 설레는 풋사랑인 척, 애틋한 첫사랑인 척, 아련한 옛사랑인 척, 청초한 살구인 척, 사연 있는 자두인 척, 치명적인 석류인 척 등.


척시리즈 립틴트


과일과 술과 사랑이 짬뽕된 복합적인 척척 핑크 군단 들이다. 이름을 읽으며 다시 한번 고개를 올려 제품 색깔을 보면, 얼마나 찰떡처럼 이름을 잘 지었는지 경탄을 금치 못한다.


이렇게 시간을 때운다. 슬쩍 지나가면 몰랐을 것들에 매력을 느끼면서.

핑크색은 여기저기 깔려있다. 하지만 핑크색을 지칭하는 많은 것들에는 아직 이름을 가지지 못한 것도 있다. 누군가 그 색깔들에 이름을 지어주는 순간, 이름을 부여받은 핑크색은 자기만의 개성강한 이미지에 기분이 날아갈 것이다. 사람들은 색이름을 보고 자기에게 어울릴 분위기를 사 간다. 이 또한 얼마나 낭만적인 순간인지.


이제는 심심하면 핑크 작명가가 되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내가 살려낼 수많은 핑크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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