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리가 내게 알려준 것

만화 <보노보노>

by 포로리

어릴 때 TV 프로그램 중 <보노보노>라는 어린이 만화가 있었다. 만화의 전체적인 파스텔톤 색감도, 캐릭터들도 귀여워서 나는 자주 TV 앞에 앉아있었다. <보노보노>를 시청하고 나면 길 건너 서점에 가서 일본어로 쓰여 있는 ぼのぼの만화책을 찾아 그 자리에서 바로 읽어보는 것을 낙으로 삼으며 지냈었는데, 보노보노보다 포로리를 좋아하는 내게 친구들은 물었다.


“너는 보노보노보다 포로리가 좋은 거야?”

“응. 당연하지”

“왜? 그것도 핑크색이라서?”


‘아니, 난 소심한 보노보노보다 당당한 포로리가 좋아. 부러워.’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포로리가 핑크색 다람쥐여서 더 사랑스러웠던 것도 있다. 목소리도 애교스러웠다. 포로리가 너부리에게 까불거리면서 “때릴 거야?”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은 얄밉지만 매일 재생시켜놓고 싶은 장면들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다. 주변 사람들은 늘 나에 대해 착각을 하곤 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내 전부를 보여준 적이 거의 없다. 늘 괜찮지 않은 것들도 괜찮은 척하며 다니는 나는 보노보노처럼 소심하다. 어른들 앞에 서면 착한 척 콤플렉스가 생겨 억지웃음도 내비치고 최대한 예의를 갖춰 행동하느라 남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다. 보노보노가 당황할 때마다 보이는 땀방울은 아마 내 뒤에서도 하늘 위로 솟아오르고 있을 것이다.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 많이 없어서 매일 걱정을 달고 살았다. 잘하고 싶은 의지와 다르게 자꾸만 더 큰 질투심만 생겨 문제 되는 일이 많았다. 게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말이 느려서 친구들이 기다리기 답답하다는 소리를 자주 했다.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어느 순간 친구들의 초점이 다른 곳으로 향하면, 나는 이내 하던 말을 그만뒀다. 중요한 순간에는 계획만 세우다가 끝나버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걱정이 많아서였다. 실패가 두려웠기 때문에. 남의 시선이 자꾸만 신경 쓰여서.


핑크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상대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고 싶어 하고, 공감받고 싶어 하는 갈망이 있다. 때문에 감수성이 풍부한 이 사람들은 상대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쉽게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한다. 어릴 때에는 포로리처럼 말투에 애교를 과하게 섞어 말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이렇게 말해야 사랑받는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주병이 아니라.


걱정 많은 보노보노 같은 내게 포로리는 내가 자리한 행렬에 늘 앞에 서있는 사람 같았다. 언제나 행동이 앞섰다. 그들에게 어떤 문제가 닥쳐 ‘어떻게 해야 하지?’를 걱정하고 있는 동안에도 귀여운 핑크 다람쥐 씨는 이미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물론 벌린 일 중엔 성공하는 것도 있고, 실패하는 것도 있지만 포로리는 실패를 인정하는 것도 늘 빨랐다.) 가슴을 꼿꼿하게 편 듯 대범한 포로리의 모습을 나는 늘 선망했다.


포로리: 보노보노야, 너도 취미가 있어?
보노보노: 좋아하는 일이 있긴 한데... 그게 취미인 건가? 난 조개를 먹을 때 통통 두드린 다음에 먹는 걸 좋아해.

포로리: 그런 건 취미가 아니야.
보노보노: 그럼 어떤 게 취미고 어떤 게 취미가 아니란 거야?

포로리: 취미는 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야.
보노보노: 아. 그렇구나. 그럼 조개를 통통 두드려서 먹는 건 뭘까?

포로리: 통통 두드리고 먹으니까 '통통 식사법'이겠지. 하지만 두드리고 먹지 않으면 ‘조개 두드리기’란 취미가 되는 거야.
보노보노: 확실히 별 도움도 안 되는 일인데 취미는 왜 있는 걸까?

포로리: 취미는 그냥 노는 거랑 똑같아. 어른이 논다고 하면 남들 보기 창피하잖아. 그래서 취미라고 표현하는 거야.
보노보노: 이제야 확실하게 알았어. 취미란 건 말이야. 어른이 된 후에도 놀기 위해서 만들어낸 말이었어!


지금 다시 봐도 <보노보노>는 몹시 철학적인 만화다. 그리고 여전히 포로리는 보노보노에게 많은 해답을 찾아주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취미가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어떤 대답을 해야 사람들이 좋아할까를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어릴 때에는 남들처럼 '음악 감상'이라고 말을 하고, 커서는 '사진 찍기'가 취미라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이제야 용기를 내어 사실을 말해본다. 내 집에 놀러 온 친구에게 내 방 침대 밑에 깊숙이 숨겨놓았던 보물상자를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어진 마음처럼. 내가 핑크에 반하고, 핑크를 모으며, 핑크색 생각들을 하고 있는 (이 세상에 도움 안 되는) 일이 사실은 내가 제일 좋아하고 잘 놀 수 있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달까?


좋아하는 작가님 중에 '포로리'처럼 매력이 통통 넘치는 분이 계시다. 이 분의 매력으로 말하자면 우선 매 순간이 감탄 속에 살며,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한다'고 항상 표현하고 산다. 체크를 좋아하며 체크만 보면 사진으로 찍어 수집한다. 체크를 수집하다가 어떤 날엔 눈동자를 수집하고, 어떤 날엔 와인을 수집하고, 또 어떤 날엔 빨강을 수집하기도 하지만 쿨 핑크처럼 혈기왕성한 작가님에겐 좋아하는 것이 한 가지가 아니라 백 가지 일수도 있다는 당연한 생각을 한다. 좋아하는 것을 대놓고 수집하다 보니 이제 주변 사람들은 길을 지나가다가도 작가님의 취향을 알아보고 사진을 찍어 보내준다고도 했다. 하루를 두근거리게 만드는 '띠용'의 순간들을 이제는 같이 즐기고 있는 것이다.



선물받은 핑크색 꽃
캠핑장 먹방 소식
친구들과 똑같이 맞췄던 핑크색 우정폰



핑크를 수집하겠다고 선언을 하고 브런치에 글을 하나둘 적어 내려가면서, 나도 똑같은 경험들을 하고 있다. 핑크색 하늘과 핑크색 꽃, 핑크색 핸드폰, 핑크색 음식들을 선물로 또는 사진 메시지로 받았다. 나는 그럴 때마다 행복한 미소가 입가에서 번진다. 이렇게 핑크빛이 퍼져나간다. 덕분에 안부도 한 번씩 물어보게 된다. 나는 기분이 좋아 오랜만에 포로리 인형을 안아버렸다.



포로리야,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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