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득 Nov 08. 2024

day3ㅡ나의 시야를 더 넓게 만든 여행

영국 런던, 그리고 유럽



by 신디북클럽







주재원으로 영국에 가 있는 친한 언니의  놀러오라는 말에 나는 괜스레 한숨이 훅하고 나왔다. 비행기, 돈, 시간, 아이들, 남편 모든 것들이 문제기도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나의 마음일지도. 사실 마음만 있다면 비행기에 몸을 싣고 14시간이면 영국에 도착한다. 히드로 공항에 서서 런던의 습한 공기를 들이키며 "이렇게 오기 쉬운걸 여지껏 못 오고 있었다니" 하며 억울해 할게 분명했다. 함께 영국에 있었던 친구와  다시 영국에 함께 여행을 가자고 처음 말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영국 여행 이야기를 할 때마다 5년, 10년, 15년.. 세월이 늘어가더니 어느새 25년이 되어간다. 우리들이 타고 다녔던 15번 빨강색 2층 버스, 불투명한 미래를 고민하던 빅벤 앞 벤치, 돈이 아까워 바라보기만 했던 런던아이, 한번 갔다하면 한동안 눈을 반짝이며 머물렀던 아스다 주류코너, 그리고 그 곳에서만 제 맛이 나는 홍차. 하숙집 작은 방 안에서 창 너머 탬즈강 위 유람선에 손을 흔들어대던 병아리처럼 맑았던 이십대의 우리.


거대한 비행기를 타고 영국으로 날아갈 때는 강해지고 싶었다. 돌아올때는 연약한 내가 아닌 강한 내가 되어 돌아오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스물 중반이 넘으면 노처녀라 불리던 시절 아빠는 영국으로 가는 딸이 못 마땅해 떠나는 날에 방밖에 나와보지도 않았고, 엄마는 떠나는 며칠 전까지도 영국에서 일어난 안좋은 뉴스를 틀고 볼륨을 높이며 내 마음이 돌아서길 바랬다. 하지만, 내가 번 돈을 들고 공부하겠다고 떠나는 고집센 딸을 부모님은 말릴 수가 없었다.  


런던을 향한 거대한 비행기를 처음 탔을때, 나는 영어에 능숙하지 않았다. 비행기 안 내 옆자리 일본인 부부앞을 화장실때문에 지나다닐때마다 너무나 미안해 "스미마셍, 스미마셍" 했더니 그들은 내가 일본인인줄 알고 말을 걸었다. 학교때 배운 일본어 실력이 이내 고갈되어 전자사전을 꺼내 영어로 대화를 했는데, 그 부부나 나나 짧은 영어실력으로 대화를 하자니 서로 무슨말을 해야할지 생각하느라 비행하는 오랜 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그 부부는 공무원으로 30대초반 쯤 되어보였고, 일주일간 휴가를 내어 캠브리지를 여행한다고 했다. 나는 그들과 영국에 있는 내내,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 부부와의 만남이 기억에 남는 내 여행의 시작이었다.


도착하고 사흘째 되던 날 뉴스를 보고 있었는데 블럭버스터 영화인가 싶은 장면이 나왔다. 영어를 이해하지 못한 그날의 우리들은 그것이 쌍둥이 빌딩으로 불리던 세계무역센터를  공격한 911 테러사건이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 정도로 영어를 몰랐으니 일자리를 바로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어학원을 다니고 TV를 보며 정말 열심히 영어공부를 했다. 중심가와 멀리 떨어져 있는 하숙집에 먼저 가있던 고등학교 때 친구와 함께 방을 구해 살았었는데, 돈이 궁했던 우리는 시시때때로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Job center를 다니고 중심가 가게를 기웃거리며 일자리가 있는 지를 물었다. 그러다 운 좋게도 한국 맥도날드에서 일했던 경험으로 쉽지 않은 면접끝에 런던 중심지 옥스퍼드스트릿 거리에 있던 맥도날드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친구들도 만나고 생활비도 벌수 있었다.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는 집을 옮겨 여러 지방 또는 여러 나라에서 온 다른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모두가 인상깊지만, 가장 기억나는 친구는 나와 동갑인 일본인 친구였다. 나라가 다른데 이렇게 대화가 잘 통할 수 있다니 우리는 서로를 신기해했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 우리는 함께 유럽을 여행하기로 했다.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피자를 먹지 못했다. 아끼며 다니다 맘먹고 들어간 식당에서 메뉴를 잘못 골라 스파게티만 세개를 먹었다. 폼페이에서 싸워 갈라지기도 하고, 일주일의 몇일을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기차에서 잠이 들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아름다운 집과 호수를 보며 나중에 여기 집하나 사자고 진지하게 말했고, 융프라호우 정상에서는 오랜만에 만난 육개장 컵라면에 함께 극찬을 했다. 친구가 아파 쓰러졌을때, 약을 가지러 갔던 사물함에서 소매치기를 만나 가방안에 들었던 여행일기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체코에서 기차를 놓쳐  기차역 앞에서 노숙을 하기도 하고  오스트리아에서 오페라를 즐기고 맛있는 음식들과 맥주를 먹고 신이나 분수대 주변을 뛰어다녔다. 지하철역에서 쫓아오던 헝가리 경찰들에게 당황한 친구는 일본말로 뭐라뭐라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화를 냈고, 나는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줄 알면서도 기억도 안나는 말을 영어로 지껄였다. 한숨을 내쉬고 결국 그들은 돌아섰으니 우리가 이긴거지만, 그때가 지금처럼 스마트한 시대였으면 우리는 서로를 오해하지 않았을테고, 도대체 무슨일이었는지 지금까지 궁금하진 않았을테다. 독일 수용소에서 친구는 우리도 너희에게 이렇게 모질게 굴었냐며 눈물을 흘리며 사죄한다고 말했고, 유명한 맥주집에서는 손님들이 다같이 춤을 추며 하하호호 배를 잡고 눈물을 흘리며 웃어댔다. 기차 같은칸에서 만난 미국인 경찰 아줌마는 친절했고, 젊은 아들은 우리를 웃겨주기 위해 진심을 다했다. 우리의 여행은 한 여름의 초록빛이었다. 


영국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영원히 있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영국의 그리움을 함께 나눌수 있는 그 시절의 친구들과 함께여서 더욱 고맙게 느껴진다. 영상통화와 실시간 연락이  불가한 시대에 나와 우리 부모님은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간을 보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좀 더 다르게 살지 않았을까? 좀 더 활기차게, 좀 더 그 시간을 즐기며. 나의 아이들이 이러한 경험을 하기 위해 떠나겠다고 말한다면 나는 두손 벌려 환영해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