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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득 Nov 10. 2024

day 5 ㅡ 책

by 신디북클럽



내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면 문득 떠오르는 때가 있다.


스물 초반, 젊었고, 건강했고, 좋은 친구들이 있었고, 건장한 부모님은 일을 나가셨고, 남동생은 군대를 갔고, 나 홀로 집에서 고요하고 자유롭게, 나만 나를 편안히 두면 아무런 걱정이 없었던 날들.


막 끓인 라면을 냄비 째 가져와 티브이 앞에 떡 앉아 김치 하나 얹어 후후 불어 먹으면서 무한도전을 보고 낄낄거리다 숨이 넘어갈 것 같던 그때, 

보고 싶던 티브이도 다 보고 라면도 맛나게 먹었고 

소파에 벌렁 누워 내가 좋아하는 태백산백, 토지, 혼불, 은희경 소설 등을 천천히 집중해 읽어내려가던 그때, 


그때가 내 인생 손꼽히는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다. 



나는 어렸을 때 책을 좋아했다. 책에서 나는 냄새가 좋아 책방 주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부모님이 사주신 책이 교재 외에는 친척들에게 물려받은 위인전 한 질과 전래동화 한 질이 다였다. 그나마 내 기억에 그 전래동화집은 검정, 파랑, 빨강 잉크로만 그림이 채워져 있었는데 전설의 고향을 연상케 하는 실감 나는 파란색 구렁이, 장화홍련의 검고 긴 머리카락, 은혜 갚은 까치의 빨간 피 때문에 그 동화책들이 무서워 1미터씩 거리를 두었다.


친구들 집에 가면 그 집에 있는 책에 시선이 꽂혔다. 그 당시 디즈니에서 나온 신데렐라나 백설공주 같은 컬러북이 유행이었나보다. 반딱반딱 윤이 나고 두꺼운 재질의 종이 위 다양한 색깔의 예쁜 공주 그림에 눈이 돌아갔다. 새로 놀러가게 된 집의 친구들과 논 기억보다는 그 집의 책들에 넋을 잃었던 기억이 난다. 피아노 학원도 책을 읽으려고 다녔다. 그 당시에는 도서관이 없어서 지금처럼 그때에도 도서관이 있어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어느 날부터 도서관 옆에 사는 것이 로망이 되어 있었다. 어릴 때 책을 마음껏 못 읽었던 한을 아이들에게 풀었다. 집에는 아이들 책으로 가득하지만 아이들은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배부른 것들, 한숨이 푹 나온다. 만약 방법을 진작 알았더라면 나는 아마 도서관 사서가 되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볼 때마다 부러워한다.


이토록 책을 좋아했던 내가 지금은 책 한 권 몰두해 읽기가 힘이 든다. 어찌나 산만한지 몇 장 넘기지 못하고 일어나기 일쑤다. 눈앞엔 날파리들(비문증)이 날아다니고 머릿속엔 해야할 일을 비롯한 잡생각들이 떠 다닌다. 자기 계발 책이나 육아 재테크 책 등을 빌려 필요한 부분만 발췌독하거나 오디오북으로 집안일하거나 이동할 때 듣는 게 다인 것 같다.


다행히 지인이 하는 책 모임에서 한 달에 한번 책을 읽는데, 책을 읽고 나서 지인이 주는 논제를 보며 생각해 보고, 멤버들이 모여서 책에 대해 깊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된다. 고등학교 때에는 재미없고 어렵게 느껴졌던 고전들이 나이 들어 읽으니 그렇게 공감이 될 수가 없다. 노인과 바다를 읽으며 노인이 청새치를 잃어갈 때의 상실감에 오열하며 울었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이 전쟁통에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안나 카레니나를 쓴 톨스토이의 심리묘사에 왜 거장인지를 느꼈고,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며 반전의 묘미를 느꼈다.  뭐라도 하라고 나 자신을 억지로 끌어다 놓지 않았다면 스토너, 향수, 가재가 노래하는 곳 등의 훌륭한 책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양한 책과 함께 글도 쓰고 인생을 다채롭게 하고 있으니, 감사한 마음이 든다.


여전히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는 즐거움을 좋아하고, 하루종일 책에 푹 빠져있는 로망을 꿈꾼다. 

왜 지금의 나는 책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건가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들지만, 언젠가는 마음의 평화를 갖고 백 퍼센트 책을 즐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젊었던 날에 은희경 작가의 문장들에 빠져 작가의 꿈을 꾸고, 비틀즈 테이프를 구입해 늘어질 때까지 듣고, 노르웨이에 가는 꿈을 꾸던, 그런 날들이 다시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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