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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피 Dec 12. 2023

꿈을 찾아서(3)

소피의 카우치에 초대합니다 Part.2

https://brunch.co.kr/@sophy100/168



쥰은 할 말을 가다듬었다.      


딱 한 번만 소원을 빌 수 있다면 뭘 빌어야 할까.     

 

“꼭 지금 말해야 해요?”     


혹시라도 잘못 말할까 봐 조심스러워진 쥰은 소피에게 물었다.      


“강요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지금 마음속에 떠오르는 게 있다면 말해도 돼요.”     


“이게 소원이 될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랑받고 싶어요. 아니, 나를 사랑하고 싶어요.”     


자신 없어하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소피는 쥰의 말에서 긍정적인 신호를 감지했다. 순간 쥰이 쥐고 있던 요술봉에서 환한 빛이 나왔다.      


“사랑을 받고 싶은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거죠?”     


“네. 난독증이 낫든 말든, 가족이 인정하든 말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싶어요. 머리로는 알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소피에게 답을 구하는 말은 아니었다. 쥰과 소피 둘 다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쥰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소피는 쥰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딴생각을 했다.      


언제인지 모를 옛날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 소피는 모든 일에 자신만만했다. 소피가 살던 세계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카운슬러이자 드림캐처였다. 숨겨진 기억을 엿보고 사람들의 마음을 끝맺게 하는 꿈의 치유자로 명성이 자자하던 소피가 이 세상에 온 건 자만심 때문이었다. 쥰에게 물었듯이 과거 소피의 스승이 단 하나의 소원을 빌라고 했을 때 소피는 오만한 목소리로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의 결과를 지금까지 톡톡히 치르는 중이다.      


“소피는 잘 알죠?”     


쥰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소피는 어느새 카우치에 누워있는 쥰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정답은 없어요. 다만 선택을 하는 것도 나고, 감당해야 하는 것도 나니까 무리하지 않으려는 요령이 생겼달까요?”     


쥰은 “아…”하고 짧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눈을 감는다. 마음이 편해진 탓인지 스르륵 잠이 왔다. 아무래도 이 카우치는 앉으라고 있는 게 아니다. 눕는데 최적화된 카우치에서 눕지 않고 배길 자신이 없다.      


“좋은 꿈 꾸길.”     


소피는 쥰이 잠든 걸 확인했다. 

예전의 능력이 남아있다면 쥰의 꿈속으로 들어가 행복한 꿈을 꾸게 할 텐데 그럴 수 없다. 지금은 조용히 좋은 꿈을 꾸길 빌어줄 수밖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푹신한 카우치를 준비하고, 편히 쉴 수 있도록 부담을 주지 않는 것. 다시 예전의 능력을 회복하려면 언제까지 이렇게 해야 할지 까마득하다. 소피는 능력을 잃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좌절했었다. 쥰과 앨리스를 만나며 지금의 자신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쥰은 깜박 잠이 든 걸 알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소피는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잘 잤어요?”     


“네. 깨우지 않아 줘서 감사해요. 뭔가 기분 좋은 꿈을 꾼 것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아요. 오랜만에 외할머니가 나온 것도 같은데…”     


소피는 책상에서 끄적이던 메모를 쭉 찢더니 딱지 모양으로 접어서 들고 와 소파에 앉았다.  

     

“자, 이거 받아요.”     


“이게 뭔가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고 했죠? 정말 정말 알고 싶을 때 이 쪽지를 펼쳐 봐요.”     


반사적으로 쪽지를 펴보려던 쥰의 손놀림이 멎었다.   

    

“봐도 모르겠으면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죠?”   

  

쥰은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처럼 말하는 소피를 보니 당장은 쪽지를 펴보지 않아도 안심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문득 언니에게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쥰의 언니 수영이 사는 동네는 처음 와 본다. 대전 자체를 와 본 적이 없다. 

다행히 수영의 집은 대전역에서 택시를 타면 금방이었다. 아파트 단지가 몰려 있는 지역이라 헤매지 않고 찾아갈 수 있었다. 쥰은 수영의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심호흡을 했다. 


3년 만이다. 집들이 선물로 휴지나 세제 따위를 사기엔 너무 늦은 감이 있어서 뭘 살까 고민하다가 무난하게 과일 바구니를 골랐다.      

쥰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언니의 모습은 머리가 길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문을 연 수영은 단발머리의 조금 낯선 모습이었다.     

 

“왔어? 들어와.”     


수영은 쥰을 보고 특별히 반가워하지도 어색해하지도 않았다. 쥰이 기억하는 냉담한 모습 그대로였다.      

쥰은 팀장님 집들이하러 갔던 때보다 더 어색했다. 그때는 직장 동료라도 있었지 언니와 단둘이 언니 집에 있는 건 너무 어색했다. 


쥰을 거실로 안내한 수영은 커피와 조각 케이크를 내왔다. 쥰이 조각 케이크의 모양이 조금 어설퍼 보여서 쳐다보니 수영이 겸연쩍어하며 말했다.      


“그거… 내가 만든 거야. 모양이 좀 그래도 먹을 만해.”     


수영이 제빵에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다. 쥰은 대답 없이 포크를 들고 한 조각 먹었다.     

 

“맛있네. 취미인 줄 몰랐네.”     


“모를 만하지. 서로 아는 게 있을 리가.”     


수영의 말이 의외였다. 쥰은 처음으로 수영의 눈을 마주 보았다. 어린 시절에 자주 봤던 표정과 미묘하게 달랐다. 특유의 덤덤한 무표정은 그대로였지만 뭐랄까 표정이 좀 더 풀어져 있었다.     

 

“왜 오라고 한 거야?”     


“한 번도 안 와봤잖아.”     


“그게 중요해? 새삼스럽게.”     


쥰은 가족과 함께 있으면 불편해도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난생처음으로 속마음을 말했다. 수영은 쥰의 거침없는 말에 놀랐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사과하고 싶었어.”  

   

“뭘?”     


수영이 사과하는 말에도 고개를 들지 않고 커피에서 나오는 연기만 바라보며 물었다.     

 

“언니 노릇 못한 거. 엄마가 동생 편만 들 때 가만히 있었던 거 모두… 네가 힘들어한 거 알아. 미안해.”     


쥰은 참 새삼스러웠다. 이런 사과를 언니한테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언니. 다 지난 일이야. 신경 쓰지 마. 언니나 나나 둘 다 피해자야.”     


“요즘 엄마 연락도 안 받고, 집에 안 간 지 꽤 됐다며?”     


역시나 엄마가 연락했나 보다. 그럼 그렇지. 쥰은 작게 한숨을 쉬며 곧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 말하려고 부른 거야? 서로 모른 채 사는 게 낫지 않아? 원래 하던 대로.”      


수영이 뭐라고 대꾸하려는데 쥰이 가로막고 한마디 더 했다.      


“엄마가 시켜서 그런 거라면 안 해도 돼. 나는 집안 유산에 관심 없어. 주지도 않겠지만. 언니 노릇 하고 싶어? 그럼 적어도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 정도는 먼저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늘 조용한 동생이었다. 

태어나자마자 떨어져 살다가 초등학생 때 처음 만났다. 엄마가 차별해도, 남동생이 제 물건을 뺏어도 가만히 있었다. 여동생까지 챙기기에는 장녀라는 이유로 부모님과 할머니가 거는 기대에 부응하기도 버거웠다. 


한 번도 손을 내밀지 않는 여동생보다 뭐든지 제 손으로 하는 법이 없는 남동생에게 더 손이 갈 수밖에 없었다. 독립 후 도망치듯 나온 결혼으로 이제야 숨통이 틔었다. 수영은 이십몇 년 만에 처음으로 속마음을 말하는 여동생이 낯설면서 부끄러웠다.      


아, 말을 안 했을 뿐 모르는 게 아니었구나.           


7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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