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카우치에 초대합니다 Part.2
https://brunch.co.kr/@sophy100/166
쥰은 요술봉을 들고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자리에 앉아 가방의 지퍼를 살짝 열어보았다. 요술봉은 그대로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이걸로 뭘 할 수 있을까? 글 앞에 두고 흔들면 난독증이 고쳐질까?
반겨주는 이 하나 없는 자취방에 빨리 가고 싶었다.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휘둘러 보고 싶었다.
삐루삐루~ 이루어져라~ 얏!
남들 보기 민망한 주문을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KTX가 느리게 느껴지기는 처음이다.
띠링~
휴대폰의 메시지 알람이 떴다.
누구지?
처음 보는 번호였다.
시간 날 때 전화 해. 언니가.
3년 만에 온 언니의 연락이었다. 쥰은 가족 중 누구도 가깝게 지내지 않지만 언니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싫어할 마음이 들 만큼 같이 지낸 추억이 거의 없다. 집 안에서 남동생이 절대적인 위치였지만 언니 수영은 장녀라는 이유로 나름대로 대접받았다. 존재감이 없는 건 쥰뿐이었다.
쥰과 언니는 여느 자매 사이와 달랐다. 꼭 필요한 대화 외에는 하지 않았다. 둘 다 집에서 독립한 후로는 더욱 접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것은 언니의 결혼식장에서였다. 언니는 결혼 후 남편의 직장을 따라 대전으로 내려갔다. 같은 서울에 살아도 아마 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언니의 전화번호가 바뀐 줄도 몰랐다. 아니, 아예 저장을 한 적이 없나? 수영은 쥰이 자신의 번호를 모를 거라는 걸 예상하기라도 한 듯 친절하게 ‘언니가’라고 덧붙였다. 그 말이 없었으면 잘못 보낸 메시지로 오해하고 넘겼을 것이다.
무슨 일이야? - 미영.
쥰은 전화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리는 없겠지만 자신의 이름을 일부러 덧붙여 보냈다.
띠링~
곧이어 답장이 왔다.
그냥. 시간 나면 집에 한번 놀러 와. - 언니가.
쥰은 답장을 하려다가 말았다. 우리가 그런 사이가 아니지 않나. 이런 말을 보내면 발끈한 것 같아 보일까 봐 문자를 썼다가 지웠다. 문자를 주고받는 것도 어색했다.
이런 사이가 아니잖아.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건데?
쥰이 난독증에 걸린 후로 엄마의 연락도 무시하는 중이다. 엄마나 남동생은 원하는 게 있을 때만 연락하니까 받지 않는다고 손해 볼 건 없다. 엄마의 전화가 몇 번 연속으로 와서 가족 전화는 아예 차단했었다.
언니는 원래 연락을 하지 않으니까 신경도 안 썼는데 혹시나 엄마가 언니한테 대신해 보라고 재촉한 거라면 더욱 만나고 싶지 않다. 소피가 보고 싶었다. 내일 바로 예약을 잡았다.
소피는 지난주와 같은 모습이었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쥰을 기다리는 것 같아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다.
“잘 다녀왔어요?”
소피의 첫인사는 여전히 한결같지 않았다. 그런 점이 좋았다.
“네, 덕분에 어릴 때 할머니와 같이 살던 동네에 다녀왔어요.”
쥰은 카우치에 앉으며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나듯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소피는 늘 그렇듯 쥰이 알아서 말을 꺼낼 때까지 재촉하지 않았다.
“저, 이거요.”
쥰은 소피가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갑자기 어색해져서 가방에서 요술봉을 꺼냈다.
“오! 멋진걸요?!”
소피라면 요술봉을 보고 비웃지 않을 줄 알았다. 상담사들은 고객의 어떤 말이든 최대한 호응해 주는 직업이지만 소피의 언행이 가식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외할머니의 생일 선물이에요. 20년 전에.”
“할머니가 쥰은 많이 사랑했나 보네요.”
“맞아요. 할머니가 돌아가셨지만 지금도 느낄 수 있어요. 할머니는 어떻게 아셨을까요?”
“사랑하면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되는 것들이 있어요.”
쥰은 지난 세션보다 한결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소피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제가 정상이든 비정상이든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알겠어요. 그래도 난독증은 고치고 싶어요. 다시 글을 쓰고 싶어요.”
“좋아요. 난독증 때문에 글을 쓰지 못하는 것 같나요?”
소피는 쥰의 바람을 잘 알고 있었다. 난독증이 저절로 사라지기를 기다리라고 하면 자신을 믿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우선 글을 제대로 쓰기는커녕 읽기도 힘드니까요.”
“그렇군요. 하지만 쓰지 않아도 생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지 않나요?” 쥰은 난독증에 걸리기 전에는 생각이 자유로웠나요?”
쥰은 대답 대신 요술봉을 만지작 거렸다. 글을 쓰면서 단 한 번도 상상력이 부족해서 못 쓴 적은 없었다. 다만 글을 완성해서 남들에게 내보이는 건 좀 달랐다.
“글 쓰는데 어려움은 없었어요. 하지만… 소피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생각이 자유로웠던 건 아닌 거 같네요.”
“왜 그렇게 생각해요?”
“저에게 글쓰기는 일종의 도피처였어요. 내 작품에서는 뭐든지 될 수 있었죠. 하지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었어요. 정확히는 가족들에게. 마음 한 구석에는 보여주고 말겠다는 강박감이 늘 있었던 것 같아요.”
“그게 잘못인 것 같아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이렇게 돼버렸으니까요.”
쥰은 요술봉을 두 손으로 꽉 쥐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서 요술봉으로 변신하고 싶었다. 소피는 쥰의 요술봉을 물끄러미 쳐다보다니 말했다.
“쥰. 지금 당장 요술봉으로 마법을 부릴 수 있다면 어떤 소원을 빌고 싶어요? 지금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고 한번 외쳐볼래요?”
“지, 지금요?”
쥰이 당황한 듯 소피를 바라보며 반문했다. 소피는 무언의 재촉을 하는 눈빛으로 가만히 미소 짓고 있었다.
“어, 그럼… 저는 난독증이 낫게 해 주세요.”
쥰은 요술봉을 두 손으로 꽉 쥔 채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쥰의 소원이 정말 난독증이 낫는 거예요? 단 한 번의 소원을 빌 수 있다면 뭐라고 할래요?”
소피가 “진짜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해야죠!”라며 재촉하자 다시 한번 목소리를 가다듬고 허리를 폈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