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카우치에 초대합니다 Part.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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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 지수는 본가에 갔다.
몇 년 만에 온 집은 그대로였다. 최대한 늦게 가려고 식사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
“언니! 왜 이렇게 늦었어?”
먼저 온 동생 희수가 보자마자 지수를 나무랐다.
“7시 저녁 아니야?”
지수가 일부러 늦게 왔다는 걸 잘 아는 희수는 다 알면서 하는 눈길을 흘리고는 “엄마! 언니 왔어!”라고 외쳤다. 현관에서 오는 소리를 들었던 아버지는 모른 척 소파에 앉아 TV만 보고 있었다.
“얼른 와. 배고프지? 밥부터 먹자.”
주방에서 요리를 하던 엄마는 지수가 어색해할 새라 식탁으로 이끌었다. 지수는 빈 손으로 오기 뭐해서 고민 끝에 사 온 홍삼 세트를 내밀었다.
“그냥 오지 뭘 이런 걸 사와.”
“…”
지수는 집에 와서 말수가 급격히 줄었다. 엄마도 지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여보, 식사해요.”라며 아버지를 불렀다.
몇 년 만에 온 가족이 모인 식사 자리는 식기를 부딪치는 수저 소리와 음식을 씹는 소리만 들렸다. 희수가 분위기를 띄우려고 가족에게 돌아가며 말을 붙였다가 모두 단답형으로 대답하자 관뒀다.
지수는 입 맛이 없었지만 깨작거리며 밥을 먹는 일 외에는 할 게 없었다. 집에 와서 한 번도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아버지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식사를 마치고 엄마가 과일을 내왔다. 지수는 거실 소파에 둘러앉아 다 같이 과일을 먹으며 대화를 하는 시간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내 짐 아직도 창고에 남아있지?”
오늘 지수가 본가에 온 목적은 찾을 게 있어서였다.
“언니, 과일 먹고 해.”
“배불러.”
엄마는 희수가 한마디 더 하려는 걸 말렸다. 여전히 아무 일 없는 듯 TV에만 시선을 고정한 아버지의 옆모습이 보였다. 지수는 찾을 물건만 아니면 이대로 나가고 싶었다. 집 마당을 돌아 온갖 정원 관리 도구와 잡동사니를 모아 둔 창고에 지수가 찾는 물건이 있어야 했다. 지수가 거의 평생을 살았던 본가에 결혼하면서 두고 간 짐을 부모님은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다.
겉면에 ‘지수’라고 쓰인 상자가 대여섯 개 쌓여 있었다. 지수는 상자를 하나씩 열었다. 학창 시절에 받은 상장, 미술과제, 편지, 책 등 추억이 담겨있었다. 상자의 윗부분만 확인하고 대충 덮었다. 다음 상자를 열었다. 찾는 물건이 없었다. 상자를 뒤지다 말고 창고 안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물건이 담긴 상자의 겉면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스티커를 붙여 놓았다.
어디 있지…
옷가지를 쌓아 둔 상자 사이에 빛바랜 홀로그램 스티커가 눈에 띄었다.
찾았다!
상자를 뒤지는 지수의 손놀림이 점점 빨라졌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동화책과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끄적인 비밀 노트였다.
왜 이걸 놓고 갔을까.
결혼 전 지수의 방에 항상 제일 눈에 띄는 곳에 있었다. 지수는 손만 뻗으면 쉽게 닿을 수 있는 침대 머리맡, 책상 앞 책꽂이에 있던 소중한 물건인데 왜 두고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돌아올 집이 있는 모험을 계속했으면 했다. 영화나 다른 책에서 보았던 온갖 경험을 짜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글보다 그림이 더 많았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혼자 간직한 자신만의 세계였다. 결혼하면서 자신의 세상도 두고 왔다.
이제 다시 자신을 찾을 때가 되었다.
소피를 만나야겠어.
지수는 결심이 서자 동화책과 비밀 노트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걸리더니 뭘 찾은 거야?”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희수가 물었다.
“어, 내 책.”
지수는 단답형으로 대답하고 식탁에 두었던 가방을 들고 나왔다.
“벌써 가니?”
엄마가 지수의 차림을 보고 물었다. 말려도 소용없다는 걸 아는지 주방에서 챙겨두었던 반찬을 가져왔다. 필요 없다고 실랑이하기 싫어서 한 손에는 반찬통을 들고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현관으로 향했다.
“끼니 거르지 마라.”
본가에 온 후 처음 들은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지수의 발걸음이 잠시 멈칫했다. 얼굴을 마주 보면 참아왔던 가시 돋친 말이 밖으로 튀어나올까 봐 그쪽으로 쳐다보지는 않았다. 이제 여기에 올 일은 없으니까.
과거는 그대로 두는 게 더 나은 일이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따르거나 침묵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갈게요.”
지수는 수많은 할 말을 뒤로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어서 와요!”
소피는 어제 만난 친구처럼 지수를 대했다.
“앨리스! 지난번보다 표정이 밝아졌네요. 잘 다녀왔어요?”
소피는 지난번 세션에서 앨리스에게 마지막으로 못다 한 인사를 하고 오라고 했다. 지수, 아니 앨리스는 소피의 인사가 고마웠다.
“제가 너무 늦게 왔죠? “
“늦은 때란 없어요. 앨리스에게 딱 맞는 때에 온 거예요.”
사실 앨리스가 해운대에 다녀온 뒤 그다음 주에 세션이 예약되어 있었다. 상담 전날 앨리스가 전화로 예약을 취소했다. 다른 날로 변경하지 않은 기약 없는 취소였다. 소피는 앨리스의 심경의 변화를 눈치챘지만 늦어도 올 거라고 확신했다.
와야 할 때라…
앨리스는 자기 마음 가는 대로 한 적이 언제였는지 까마득했다. 늘 남들이 정해놓은 정답에 맞춰 살았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는 장녀로만 살았다. 앨리스가 이혼했을 때 그동안 쌓아왔던 모습이 무너졌다. 말하지 않아도 실망한 표정의 부모님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웠다. 정작 힘든 자신을 방치하자 병이 났다.
“소피는 뭘 보고 날 그렇게 믿어요?”
울컥 한 마음에 삐딱한 말이 나왔다. 투정이라는 걸 아는지 소피는 더 활짝 웃으며 답했다.
“남에게 상처주기 싫어서 대신 다 끌어안는 사람은 자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에요. 앨리스가 그래요.”
“인사는 잘하고 왔어요. 그 뒤로 악몽을 안 꿔서 사실 안 와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앨리스는 세션을 취소한 이유를 솔직하게 고백했다.
“소피에게 직접 말해주고 싶었어요. 모두 꿈만 같아요.”
“꿈이면 어때요? 더는 겁내지 않아도 돼요. 앨리스가 다 해낸 거예요.”
소피의 티 나지 않는 격려는 묘한 힘이 있다. 틀에 박힌 조언 대신 앨리스가 스스로 방향을 정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앨리스는 해운대에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한 후 앞으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는데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엄습했다. 본가에 다녀온 후로 그게 뭔지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소피가 필요했다.
“사실, 악몽을 꾸지 않으니까 더는 소피를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다시 정상이 되었으니까요.”
앨리스의 연이은 고백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런데…라는 말을 할 것 같은데요?”
쉽게 말을 잇지 못하는 앨리스에게 소피가 농담하듯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런데… 이상해요. 다시는 전과 같지 않아요. 굳이 꼭 전과 같아야 하냐면 그건 아니지만… 오랫동안 악몽에 시달려서 그런지 뭔가 허전해요. 과거에 전하지 못한 말도 다 하고, 본가에도 가고, 어린 시절 좋아하던 물건도 찾고 직장에도 복귀했는데 뭐가 문제일까요?”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은데요? 확신이 필요하다면 앨리스가 생각한 게 맞아요.”
앨리스도 뭐가 문제인지 알았다. 답을 모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