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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피 Mar 02. 2024

이렇게 내가 된다

'경상도'식 말고 '용주부'식 소고깃국

여느 때와 다름없는 주말 오후, 공룡이가 용주부가 되고 나서 새로운 루틴이 생겼다. 


용주부 :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나 : 한 가지 있어. 소고깃국. 소고기뭇국 말고! 
용주부 : 경상도식 말하는 거지? 맑은 국물 말고 빨간 국물?
나 : 맞아 그거! 엄마가 해주던 거. 
용주부 : … 장모님께 여쭤봐야 되나?

끼니때마다 뭐 먹고 싶냐고 묻는 건 일상이지만 그때마다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고 했었다. 엄마 밥을 안 먹은 지 십 년이 넘었는데 갑자기 소고깃국이 생각났다. 


서울에서 말하는 소고기뭇국은 맑은 국물을 베이스로 해서 별로 입에 맞지 않았다. 매운 걸 못 먹는 맵찔이지만 엄마가 해 주던 고춧가루가 들어간 소고깃국은 곧잘 먹었다. 


딱히 음식에 대해 공룡이 만큼 주관이 뚜렷하진 않아서 굳이 ‘엄마가 해주던 ~~ 음식’을 일부러 찾지는 않는다. 밥상을 받아먹다가 차려 줘야 하는 입장이 되고 보니 맛의 취향보다 하기 편한 음식이 최고다. 


오랜만에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니 용주부의 열의가 넘쳤다. 그의 한결같은 요리 선생 **브를 한참 뒤지더니 만들기 시작했다. 사실 공룡이는 대파, 무를 좋아하지 않는다. 음식에 대한 호불호가 명확한 사람이 대파, 무가 필수 재료인 소고깃국을 끓여주다니 이것만으로도 대단한 성의다. 


소고깃국은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야 맛있다며 제일 큰 스탠 냄비에 한 솥을 끓였다. 좁은 주방에 고추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용주부 식 소고기국

용주부 : 어때?
나 : (국물부터 한 숟갈 뜨고)... 음~ 이 맛이 아닌데? 국물이 텁텁해. 엄마 꺼는 시원한데.
용주부 :(발끈하며) 먹지 마! 먹어본 적도 없는 걸 만들라고...
나 : (아랑곳 않고)아냐! 이건 용주부표 소고깃국이니까! 육개장처럼 얼큰한 맛이 나네^^


 용주부는 나의 맛 평가에 “칭찬이야 욕이야 하나만 해!”라며 툴툴댔다. 나는 오래간만에 속을 뜨끈하게 데우는 경상도식이지만 엄마표는 아닌 용주부의 소고깃국으로 배를 든든하게 채웠다. 따뜻한 집밥을 한 술 먹을 때마다 항상 차가운 발가락부터 찌르르하게 쫙 퍼지는 온기가 온몸을 감싼다. 


그래, 이 맛이야!
 

비록 엄마의 소고깃국은 아니지만 처음 맛보는 용주부의 소고깃국에 마음이 절로 풀린다. 아무리 같은 레시피로 정확하게 개량해서 요리를 해도 사람 따라 손 맛이 차이 난다.


요리하는 사람의 마음이 들어가서 그런 걸까?


용주부는 난생처음 소고깃국을 끓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 : 요리하면서 무슨 생각해?
용주부 : 별생각 없는데?
나 :... 뭐, 맛있게 만들어야겠다 이런 생각 안 해?
용주부 : 딴생각을 하는 순간 요리를 망치는데?
나 : 그건 그래.


요리는 잡생각을 없애는 효과가 있다. 

의도하지 않은 동작으로 요리를 완성하는 것만 집중하게 된다. 딴생각을 하는 순간 요리를 망치기 쉽다. 특히 한꺼번에 두 가지 이상의 요리를 하는 경우에는 낭패다.

 

내가 소고깃국에 대한 기대치가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비슷하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했단다. 하지만 용주부는 엄마의 소고깃국을 먹어본 적도 없고, 레시피도 물어보지 않았다. **브를 참고하긴 했지만 자기식대로의 소고깃국을 탄생시킨 셈이다. 


내가 요리할 때는 몰랐다. 엄마의 요리를 용주부에게서 맛보니까 요리에 각자의 개성이 한 스푼이라도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만의 요리를 통해 미처 몰랐던 자기의 모습을 새롭게 발견하는 과정은 지켜보는 사람도 즐겁다.

 

남이 정해준 목표 말고, 자신이 원하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에 있는 용주부가 전혀 뜻밖의 행보로 요리를 하면서 긍정적인 자극을 많이 받는다.


용주부가 돈을 벌기 위해서나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요리를 시작했더라면 얼마 안 가 지쳐 떨어졌을 것이다. 혹은 남이 아는 맛과 비교했다면 그냥 사 먹자고 했겠지. 어설프게나마 요리를 시작해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한 끼 나누는 식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줄은 몰랐다.


그의 요리하는 마음을 보며 나의 글 쓰는 마음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글을 쓸 때마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기복이 심하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글 써서 뭐 해?’, ‘굳이 나까지 글 쓸 필요가 있어?’, ‘작가가 되지 말라는 신의 계시(?)인가 봐’ 따위의 자학이 끊이질 않는다. 그냥 하던 공부나 마저 하자며 쓰던 글을 덮어두고 만다。 거절의 두려움 때문에 좋아하는 일도 실패할까 봐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어떻게 안 건지 우연히 접한 정아은 작가의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는 생각지 못한 내적 동질감을 심어주었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것이 나의 성향, 나의 본질, 그리고 빌어먹을, 나의 운명이라는 사실을. 글쓰기를 통해 잘 나갈 수 있든, 그렇지 못하든, 나는 언제나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인간이었다. 
- 정아은,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 中


정아은 작가는 몇 년간 도전하던 문학상을 받으면 작가로서의 인생이 탄탄대로일 거라 착각했다. 그 착각은 얼마가지 않았단다.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는 문학상을 받고 화려하게 등단한 뒤 작가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도 공모전에 도전할 때 당선만 되면 인생이 달라질 거라는 기대감을 품고 시작한다.  떨어지면 한동안 인생이 끝난 것처럼 우울 모드로 바닥을 친다. 


한겨레 문학상을 받고 나름 화려하게 등단한 정아은 작가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물론 처지는 다르지만, 매 순간 평가받는 작가라는 특성상 멘탈이 무너지는 일에 도저히 면역이 되질 않는 공통점이 있었다.


신기했다. 등단 작가도 이렇다니.

작가가 ‘되는’ 것보다 작가로 ‘사는’ 게 더 어렵다더니 딱 그랬다. 정아은 작가는 공모전에 당선된 뒤 생각처럼 장밋빛 미래는 오지 않았고, 출판사에 차기작을 몇 번이나 까이고 나서 절필을 선언하기도 했다. 


문학상을 받은 뒤 장편을 세 권 출간하고, 그로 인해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나는, 글쓰기는 그런 명예와 속세적 영광을 얻을 때만 해야 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그러나 글쓰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기쁘나 슬프나, 원고에 대한 거절 메일을 받으나 받지 않으나, 마음을 언어로 옮기고 싶어서 환장하는 것, 그게 글쓰기의 본질이었다.  
- 정아은, 이렇게 작가가 되었습니다 中

뭔가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이번 작은 대박이 날 거야!’라는 헛된 기대감으로 쓰기 시작한다. 신 내린 듯 써 내려간 원고는 늘 그렇듯 ‘초고는 쓰레기’라는 공식을 피해 가지 못한다.

 

며칠간 출판사에 투고하기 위해 잠자는 시간 빼고 글쓰기에만 매달렸다. 될지 안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가능성은 0%다. 단, 0.1%의 가능성을 위해 나는 또 쓰고, 좌절하고, 다시 또 쓴다.


정신분석학은 나의 무의식에 감춰진 진짜 욕망을 찾아가도록 돕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금 상태, 결핍된 상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우선한다. 만약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거나 평범하지 않아서 ‘비정상’이라고 느낀다면 그것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비정상’을 ‘정상’으로 만든다거나 현재의 문제를 개선하는데 초점을 두지 않는다.

 

지금의 내 모습을 물이 반쯤 차 있는 물컵에 비유한다면, 그 컵에 마저 물을 따라야 하거나 비워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물이 덜 차 있든, 흘러넘치든, 물컵이 깨끗하든 아니든 간에 그 자체로는 잘못된 게 하나도 없다.

 

불교나 명상에서도 같은 원리를 다르게 해석하고 있을 뿐 진리는 똑같다. 물론 이건 절대 진리가 아니라(불교에서는 불변하지 않는 진리란 없다고 했다)내가 공부하고 깨달은 생각이니 옳고 그르고를 판단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내가 된다는 것’은 지금보다 나은 상태로 살을 빼고, 외모를 가꾸고, 스펙을 쌓고,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부족함이 있는 상태가 바로 완전한 상태이다. 그저 부정하지 말고 받아들이면 된다.

 

아직은 글밥 대신 용주부의 소고깃국으로 배를 채우는 신세지만 나는 내가 얼마나 행운아인지 안다. 

용주부의 요리를 먹으며 ‘글로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자랑질을 하려는 게 아니라 이 맛을, 이 기쁨을 표현하는 나만의 방식이 글쓰기다. 


며칠간 출판사에 투고하기 위해 5만자 분량의 글을 쓰느라 얼마나 모니터를 뚫어지게 봤던지 한쪽 눈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그 핑계로 글 쓰지 않은 지 하루, 이틀이 지나면 슬슬 불안해진다. 마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내 글을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쓰지 않는 상태가 불안하다.


오늘은 용주부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주말이다. 용주부는 요리를 하며 새로운 도약을 꿈꾸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꿈이 생겨서 본인도 신기해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원래 그런 사람인 듯 너무나 잘 어울린다.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다.


용주부는 요리를 통해, 나는 글쓰기를 통해, 이렇게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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