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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피 Mar 10. 2024

은둔의 시간을 끝낼 때

김치찌개엔 참치파 vs 돼지고기파

대학원이 개강하고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가 왔다. 

1, 2월은 2024년의 러닝 타임이었다면 3월부터 새로운 시작이다. 

올해는 지난한 은둔의 시간을 끝내고, 밖으로 나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예감하기라도 하듯 연말 우울증(연말, 연초 우울증. 나만 그래? 에) 걸렸었다. 


한동안 은둔의 시간을 보내면서 철저히 외부와 고립되다시피 했다. 한때는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기도 하고, 갑갑함과 무료함, 두려움 속에서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이제 좀 익숙해질 만하니 어느새 밖으로 나갈 때가 되었다. 은둔의 시간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 안달할 때는 언제고 막상 밖으로 나가야 할 때가 되니 망설여진다. 


불길한 예감은 한치도 비켜가지 않는다는 걸 몸소 증명하기라도 하듯, 대학원에서 원치 않게 과대표가 되었다. 임원이나 타이틀을 가진 직함은 몇 년 전 회사에서 허울 좋은 '대표'직을 끝으로 그만두었는데 말이다. 

역시 한국의 정서상 답답한 사람이 나서면 일만 더 많아지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인가 보다. 


대학원에서 주변인으로만 살다가 조용히 내 연구만 하고 졸업하는 게 목표였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부담을 떠안게 되자 용주부도 황당해했다. 용주부는 평일 하루 종일 수업하는 나를 배려해 바로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김치찌개를 한 솥 끓여두었다. 


원래 우리는 돼지고기 김치찌개 파였는데 이번엔 참치 통조림이 생겨서 참치 김치찌개도 끓여보았다. 용주부는 참치김치찌개를 처음 끓였는데 돼지고기 김치찌개와 다른 시원한 맛이 났다. 


나: 우와! 생각보다 국물이 깔끔한데? 
용주부: 그치? 뒷맛이 깔끔하네.
나 : 근데 확실히 좀 매워. 대체 청양고추를 몇 개나 넣은 거야?
용주부 : 3개!


용주부는 참치로만 김치찌개를 끓이면 참치 특유의 비린맛이 날까 봐 평소보다 칼칼하게 끓였다. 맵찔이인 내가 먹기에는 속이 따가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자꾸만 국물을 떠먹게 되는 마성의 맛이 있었다. 김치찌개를 먹으면서 국물을 더 많이 먹은 건 처음이다. 

얼큰하다 못해 맛있게 매운 참치김치찌개

손이 큰 용주부는 이번엔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찌개도 끓였다. 쉬는 날에 다음 주 먹을 반찬을 미리 만들겠다며 참치김치찌개에 이어 돼지고기 김치찌개까지 동시에 했다. 그 덕에 남아나는 김치가 없다. 양가에 김치를 가져다 먹지 않은 지 일 년이 넘었는데 또 김치를 사야 한다. 친정 엄마는 김치를 왜 사 먹냐고 하지만, 맛은 비할 바 못되어도 필요할 때마다 사 먹는 게 마음 편하다. 


김치찌개엔 맛있는 김치가 필수라고 생각했는데 용주부의 김치찌개로 그 생각이 바뀌었다. 물론 김치가 맛있으면 더 좋겠지만 한꺼번에 많은 양을 끓여서 다음날 다시 끓여 먹으면 더 맛있었다.


용주부가 끓인 돼지고기 김치찌개는 그야말로 김치 반, 고기 반이었다. 돼지고기 비계가 같이 우러나와 국물은 참치 김치찌개에 비해 묵직하고 들큰한 맛이 났다. 


다른 반찬이 필요없는 돼지고기 김치찌개


나: 같은 김치라도 재료에 따라 맛이 다르네?
용주부 : 돼지고기가 많이 들어가서 그런가 봐.
나: 참치김치찌개보다 청양고추를 적게 넣었어?
용주부 : 응! 대신 고기를 듬뿍 넣었지. 

역시 요리엔 재료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용주부가 휴일을 반납하고 한 솥씩 끓인 참치 김치찌개와 돼지고기 김치찌개 덕분에 다음 주까지 든든해졌다. 김치찌개는 한 일주일은 냉장고에 두어도 먹을 만큼만 다시 끓이면 깊은 맛이 난다. 


김치찌개가 아니었다면 김치를 이렇게까지 많이 먹지 않았을 것이다. 김장 김치가 숙성하는 중간의 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치만으로 밥을 먹긴 어려운데 김치찌개는 다른 반찬이 없어도 된다. 


우리는 밥상에 메인 요리 외에 반찬을 곁들이지 않는 편이다. 용주부는 내가 차려주는 밥을 먹을 때도 입맛은 까다로워도 반찬 가짓수를 따지지는 않았다. 별로 젓가락이 가지 않는 변변찮은 반찬을 곁들이느니 메인 요리 한 가지만 두고 먹는 걸 선호한다. 


김치찌개는 이런 우리의 식성에 딱 맞는 요리다. 몇 번이나 같은 메뉴를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용주부는 이번에 참치김치찌개와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함께 끓이느라 냄새에 질렸는지 당분간은 김치찌개를 하지 않겠다 선언했다. 그래도 어쩌나. 아직 냉장고엔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한 솥 남아있다. 


김치는 은둔의 시간을 지나면 더 숙성되어 묵은 맛이 난다. 김치찌개는 끓인 당일 보다 다음 날 끓여 먹는 게 더 맛있다. 


사람도 은둔의 시간을 지나면 좀 더 성숙해질까. 

뒷맛이 칼칼한 참치김치찌개나 뭉근한 맛이 나는 돼지고기 김치찌개 처럼 하면 할수록 더 깊은 맛이 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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