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딸 콤플렉스는 그만
당신에게 가족이란 어떤 존재인가?
나에게 가족이란 "주어야 하는" 존재다.
기대거나 기대할 수는 없는 존재.
존재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존재도 맞다. 가끔.
생각만 해도 갑갑한 존재였다. 집을 나오기 전에는.
부모에게 벗어나기 위해 나보다 일찍 결혼한 오빠를 속으로 '배신자'라 욕하며, 오빠 몫만큼 내가 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창 꾸미기 좋아할 20대의 나이에 구제샵에서 1~2만 원으로 득템 하기 위해 먼지 나는 옷 더미를 헤매도 부모에게 주는 몇 십만 원의 돈은 아깝지 않았다.
지잡대 문과 출신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한정적이었다. 빚내는 능력만 탁월한 부모덕에 졸업도 전에 신용불량자가 되어 선택지가 별로 없었기에 벌이가 시원찮았다.
내가 아무리 생활비를 대고, 매달 대출 이자를 감당해도 딱 그뿐. 이 지긋지긋한 상황 자체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은 되지 않았기에, 그조차도 힘에 부쳤지만, 부모가 고맙다거나 대견해하지 않아도 당연하다 여겼다.
다른 집 자식들은 부모가 못해줘도 알아서 잘만 돈 벌더라.
어느 날, 어머니의 지나가듯 내뱉은 이 말 한마디에 뚜껑이 열린 나는 난생 첨으로 아무 말 없이 서울에 사는 친구 집으로 갔다. 서울로 독립하리라 굳은 결심을 하고 나갔지만, 나는 내 생각보다 더 우물 안 개구리였고, 겁이 났다.
서울에서 며칠 방황을 하고 있는데 웬만하면 전화를 하지 않던 오빠에게 전해 들은 말로는 "부모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나간 년"이 되어 있었다. 그 말에 상처를 입었는지 죄책감을 입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당장은 서울에 있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합리화하며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걸렸던 것 같다. 서울로 이사를 오기까지는. 그때도 나 혼자였으면 아마 못 왔겠지. 돌이켜보면 그때부터가 진정으로 부모와 떨어져 정신적으로 독립을 하는 시작이었다.
내 나이 서른 중반에서야 말이다.
"부모 버린 매정한 년"이라는 타이틀을 달지 않으려고 결혼이라는 합법적인 탈출을 감행했고, 그 결과 또 다른 탈출이 필요해져 버렸지만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
불행 중 다행인지 부모님은 내가 서울에서 자립하려고 아등바등하는 동안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방해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정도의 양심은 있었기에 같이 살 때보다는 감정적으로 덜 힘들었다.
내 상황을 사실대로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나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요구는 아니고 부탁을 해 오긴 했지만 익숙한 일이었기에 그냥 받아들였다.
서울에서 몇 년의 고군분투 끝에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에 제일 늦게 집에 통보를 했다.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어머니였다. 죄송하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더 이상 타인을 위해 나의 선택을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충격과 상처는 내가 감당할 몫이 아니다.
실제로 가족들에게 이렇다 할 위로는 받지 못했다. 뭐, 대단한 자랑도 아니고 위로를 바란 것도 아니다. 그냥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암묵적으로 동정의 마음을 품은 것이 보였지만 짐짓 모른 채 했다.
어머니는 왜 자신에게 이런 시련까지 겪어야 하는지 딸의 상처보다 본인의 처지를 더 비관했다. 뭔가 엄청난 죄를 짓고 돌아온 탕아 마냥 가족들 사이에서 유별난 존재가 되어 버렸다.
타지에서 살다가 힘들면 고향이 그리워진다고 했던가.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문득 이 넓고 낯선 타지에 홀로 있다는 생각이 가끔씩 두렵긴 했지만 그렇다고 집이 그리운 건 아니었다.
나에게 그리운 존재는 없었다.
나의 상황이 바뀐 것과 별개로 부모는 여전했다. 아니, 나이가 들수록 신세한탄만 늘고 자기 설움만 늘었다.
아무도 받아주지 못하는 감정 쓰레기통 역할을 요구하는 가족들에게 좀 더 멀어지고 싶었다.
가족끼리는 말이야.
거리는 최대한 멀게, 계좌번호는 가까이하면 되는 거야.
금융치료가 만병통치약이거든.
우스갯소리로 공룡이에게 이런 말을 하면 "신기하게 가족과의 모든 갈등 상황에 대입하면 다 통용된다"라며 마치 마법의 주문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통쾌해했다.
정서적 독립을 조금씩 하게 되면서 가장 좋은 건 이제 더 이상 내가 해주지 못하는 걸로 죄책감까지 가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해준다 한들 그 상황 자체를 바꿀 정도의 도움이 아니면 별 소용이 없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다.
어버이날, 명절, 생일 등등 기념일 같은 날에 나한테 쓰는 돈은 단돈 만원도 아껴도, 못해도 십만 원이라도 꼬박꼬박 보냈었다. 더 이상 이런 날에 '굳이' 무리해서 뭘 하지 않으려고 하는 나를 처음에는 의아하게 여겼던 공룡이에게 또 말했다.
"매달 십 만원씩 열 달을 주는 것보다, 한 번에 백만 원 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야. 성의표시라고 해 봤자 티도 안 날뿐더러 별 도움도 안 되는데 무리해서 할 필요 없어. 차라리 그 돈으로 고기나 사 먹고 말지."
이런 내 말이 얼마나 매정한 딸로 들렸을지는 모르겠다. 말하는 나도 낯설었으니까.
한동안 잠잠하던 집에서 아버지의 실직 소식이 들렸다. 돈을 '빌려달라'는 말과 함께.
오빠에게 이미 소식을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설마 나한테까지 전화가 올까 반신반의했었다. 말할 데가 없어서 그렇다며 울먹이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나도 모르게 수화기를 점점 더 멀어지게 했다.
알다시피 지금 내가 백수잖아. 무슨 돈이 있겠어? 있으면 당연히 주지.
그건 그렇고, 집에 김치 남은 거 있으면 좀 줘. 없으면 말고.
작년에 김장을 따로 안 해서 김치가 얼마 없다는 어머니의 말에 "그럼 됐으니 신경 쓰지 마라"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새로 담아서 달라는 것도 아니고, 김치가 있으면 나눠달라는 말이었기에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며칠 뒤에 오빠에게 또 전화가 와서(우리 남매는 집에 일 있을 때만 전화를 한다. 그래서 전화 소리가 나면 깜짝깜짝 놀랜다.)
"엄마한테 김치 달라고 했냐? 팔 아프다는 양반이 김치 담는다더라."
오빠가 얼마 간의 금전적 도움을 줬고, 그 돈 중 일부를 김치 담는데 썼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며칠 만에 묵은 김치 몇 포기를 보내왔다. 맛있었다.
일부러 안부 전화를 하지는 않았다. 도와주지도 못할 거면서 괜히 물어봐서 뭐 하나. 물어볼 자격도 없다 싶었다. 가족이라고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도 없고, 그럴 능력이 되는 사람도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나 자신을 비관했었다. 나는 왜 이렇게 능력이 없는 걸까. 왜 남들처럼 번듯한 직장에 오래 다니면서 꼬박꼬박 저축해서 부모님 용돈도 드리고, 효도도 하지 못하는 걸까. 그렇다고 상냥하고 다정한 성격은 더더욱 아니어서 말 한마디 좋게 하는 것보다 돈을 주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정신분석을 공부하면서 이 모든 것의 근원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의 감정과 열등감, 욕망에 대해 깊게 들여다볼수록 혼란스러웠다. 마치 침잠해 있던 불순물을 휘저어 물 위로 떠오른 것처럼 그 오래된 감정의 찌꺼기가 쉽게 사라지지 않아서 차라리 덮어둘 걸 곤혹스러웠다.
난생처음 부모에게 매몰차게 말해놓고, 며칠 동안 악몽을 꿨다. 후회한 건 아니다. 솔직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했을 뿐이고, 잘했다고 생각한다. 홀가분한 마음과는 별개로 가슴이 아픈 건 어쩔 수가 없다.
단지 내 탓은 아니잖아.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기로 했을 뿐인데 타인의 비난도 원망도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내 선택에 의한 거라면 좋든 싫든 받아들여야겠지.
모두에게 좋은 선택이란 없다.
우선 순위를 정해야 한다면 언제나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