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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by 고석근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미셸 푸코)


나방이 한 마리 벽에 붙어 힘을 못 쓰네 방바닥으로 머리를 향하고 수직으로 붙어 숨 떨어지기를 기다리네 (…)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은 슬프지 않아라, 슬프지 않아라


- 이성복,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 부분



늦가을, 뒷산에 올랐다가 힘겹게 기어가는 방아깨비를 보았다.

누렇게 변한 몸, 배가 불룩했다.

어디 아늑한 곳에서 알을 낳을 것이다.

그리곤, 고요히 숨을 내쉬며 이 세상을 하직할 것이다.

장례식이 없는 죽음.

산에는 주검이 보이지 않는다.


생사일여(生死一如),

인간도 이렇게 깔끔하게 살다 갔으면 좋겠다.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미셸 푸코는 말한다.

“만약 이 ‘배치’들이 사라진다면, 그리하여 인간의 몸짓, 교환, 언어 속에서 자신의 확고한 현존을 얻게 된 ‘인간’이라는 이름의 심층이 제거된다면, 장담할 수 있건대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그렇다. ‘인간’은 근대 산업사회의 산물이다.

산업사회가 되며,

가문을 벗어난 ‘개인’이 탄생했다.

가문에 소속된 인간과 개인은 전혀 다르다.

가문에 소속된 인간은 가문이 속한 왕국에 속하고

왕국이 속한 천지자연에 속하게 된다.

따라서 어디에 속한 인간은 인간이라는 개념이 희미하다.

그때는 죽음도 현대인과 달랐다.

죽음은 ‘돌아가는 것’이었다.

현대인의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다.


산길을 걸으며

나를 천지자연에 풀어놓는 연습을 한다.

깔끔한 죽음을 맞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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