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처작주(隨處作主)
그대는 더 나은 것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해야 한다. 그대는 더 높은 차원으로 부활하기 위해 기꺼이 죽어야 한다. - 프리드리히 니체
마야 슐라이퍼 작가의 그림책 ‘거인의 집’을 읽고 ‘나와 집’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옛날 옛적에 한 거인이 살았어요.
어찌나 몸집이 큰지 자기 집 안에서도 웅크리고 있어야 했지요.
밖으로 나가는 건 거의 엄두도 못 냈고요.
집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올 자리가 전혀 없었어요.
개미 한 마리도요.
그런데 어느 날 보니, 구석에 작은 거미가 있는 게 아니겠어요?
“내 집에서 나가!”
하지만, 거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거미줄을 치고 또 쳤다. 거인이 재채기를 하기 시작했다.
에취! 에취! 에이취! 흐이취!
거인의 집이 다 날아가 버렸다. 그때 거미가 거인의 어깨 위로 뛰어 올라가며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
“요렇게 쪼끄만 네가 어떻게 도울 건데?” 거인은 새 집을 찾아 길을 나섰다. 거인은 도시를 지나고, 시골 마을도 지나고, 해가 떠올라 몸이 따뜻해질 때도 걷고, 바람이 불어 몸이 차가워질 때도 걸었다.
거인은 피곤해져서 땅바닥에 누웠다. 그리고는 잠이 들었다. 거미는 곧바로 거미줄을 짜기 시작했다. 거인은 깊고도 긴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뜬 거인은 자기 몸에서 자라나 있는 것들을 보았다. 바람에 날려 온 씨앗들이 거미줄에 붙어 자라다가 봄꽃을 피운 것이었다.
꽃들은 향긋한 향기를 풍겼다.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거인의 귀 뒤에 둥지를 틀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거인의 몸에서 나무 한 그루가 자라더니 다른 나무들도 계속 자라기 시작했다. 울창해진 숲에 동물들이 모여들었다.
거인은 누구든지 와서 살 수 있는 넉넉한 집이 된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집을 지으려 한다. 항상 노래와 젖과 꿀이 흐르던 엄마의 자궁은 우리의 원초적인 집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원초적인 집을 거인처럼 자신의 몸만한 집에서 찾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 다른 집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아버지가 절대 권력을 가진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라나, ‘아버지’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일생동안 특정 종교에 빠져 살아간다. 하늘에는 항상 강한 아버지가 계시고, 자신은 땅 위에서 아버지의 명령대로 살아가는 아이가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남들이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자신의 집이 전부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가기 힘들다. 어릴 적의 아버지가 신이 되어 그를 인도해야 하는 것이다.
중국 당나라 임제 선사는 말했다.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어라. 머무는 곳이 모두 진리의 자리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主 立處皆眞.)
진리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야 삶의 자리가 진리가 된다.
잘못된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몸은 어른이어도 정신은 여전히 자라지 못한 아이다.
종교를 안 믿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가며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 일부는 돈, 직장의 상사, 학교 선배가 아버지였다가 이제 아버지를 신으로 바꾼 사람들이다.
그들의 얼굴 표정은 기괴하다. 입으로는 행복하다고 말을 하는데, 표정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제대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은 해맑다. 순수한 아이의 얼굴이다. ‘사이비 종교인들’의 얼굴에는 유치한 아이와 탐욕스러운 어른의 표정이 함께 있다.
임제 선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라!”고 말했다.
어른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꾸려가야 한다. 그러려면, 마음속에 들어와 계속 명령을 내리는 ‘부처(신)와 부모’는 죽어야 한다.
명상을 해보면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마음이 맑디맑을 때, 우리의 마음은 한없이 넓다.
자신의 몸만한 집은 사라지고 만물을 다 품을 수 있는 우주만큼 커다란 넉넉한 집이 된다.
우리는 이러한 한없이 넓은 마음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너의 몸만한 집에 웅크리고 살아가라!’고 하는 모든 마음속의 명령을 떨쳐버려야 한다.
아버지
언제 언제까지
아버지야
네가 어른이
돼도 아버지야
와 기쁘다
아버지
아버지
때로는 어린이가
되어줄래
흉내 내봐도
안 되는 구나
가엾어라
아버지
- 쓰루미 마사오, <아버지> 부분
아직 ‘아버지의 성(城)’에 갇혀 있는 줄 모르는 아이는 아버지와 영원히 친구가 되고 싶다.
‘아버지/ 때로는 어린이가/ 되어줄래’
하지만 아이는 아버지의 얼굴 표정을 본다. ‘흉내 내봐도/ 안 되는구나/ 가엾어라/ 아버지’
아버지는 엄숙한 표정을 대를 이어 물려받았다. 요즈음 젊은 아버지들은 이 표정을 벗어버리고 있다.
그토록 견고했던 가부장 사회가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