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여역수(學如逆水)
죽은 물고기만이 물결을 따라 흘러간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오래 전에 개울에서 허연 배를 번득이며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을 본 적이 있다.
한참 동안 눈이 시리도록 쳐다보았다. 무엇이 그들에게 저토록 물결을 거슬러 헤엄쳐 올라가게 할까?
타고 난 본능일 것이다. 대대손손 전해진 물고기의 생명성일 것이다. 그러다 지쳐 죽으면 물결을 따라 흘러갈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명성은 다른 물고기에 의해 보존될 것이다. 만일 물고기들이 힘들다고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려 하지 않는다면, 물고기들은 조만간 생명계에서 퇴출될 것이다.
물고기들을 보며 나도 내 안에 꿈틀거리는 강력한 생명성이 느껴졌다. 그런데 인간은 조금만 방심하면 생명성이 약해지기 쉽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 자신을 속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 이미 죽은 사람들을 많이 보지 않는가?
미국의 영화감독 사뮤엘 퓰러의 영화 ‘마견’을 보았다. 악마가 된 흰 개에 대한 섬뜩한 이야기다.
젊은 여성 줄리는 밤길을 운전하다 독일산 셰퍼드를 치게 된다. 그녀는 개를 치료해주고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다.
그런데 그 개가 집을 나가고 흑인들이 개에 물려 죽는 사고가 일어난다. 그 개는 한 백인 남성에 의해 흑인을 보면 죽을 때까지 공격하도록 훈련된 개였던 것이다.
안락사 시킬 것인지 재훈련시킬 것인지를 고민하던 그녀는 흑인 조련사에게 개를 재훈련시키도록 한다.
개는 혹독한 훈련을 거치며 흑인을 공격하지 않게 된다. 훈련이 성공이라고 환호성을 지를 때 쯤, 개가 원래의 주인을 닮은 백인 남자를 사납게 공격하게 된다.
흑인 조련사는 개를 사살한다. 개는 쓰러졌다. 헐떡이는 입으로 피가 철철 흘러내린다. 죽어가는 개의 눈동자가 클로즈업된다.
개는 안타깝게 울부짖고 있을 것이다. “이게 아닌데, 제가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어요. 저를 구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요. 그런데 저도 모르게 그 백인에게 달려갔어요.”
TV에서 보았다. 살인범에게 기자가 물었다 “왜 그러셨어요?” 살인범은 울먹이며 대답했다. “저도 모르겠어요. 제 안에 악마가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자신 안의 충동에 의해 행동하는 존재다. 이성은 그 행동을 합리화할 뿐이다.
우리는 인간의 충동을 잘 보아야 한다. 인간 내면의 깊은 어둠 속에서 올라오는 충동. 그 충동을 항상 살펴보아야 한다.
그 개는 흑인에 대한 증오는 사라졌지만, 증오하는 마음은 사라진 게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그 증오의 에너지는 자신을 악마로 만든 백인 남자에게 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어린 시절에 자신도 모르게 습득된 나쁜 습성은 평생 간다.
공부는 학습(學習)이다.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그 개는 흑인을 증오하도록 학습이 되었다.
흑인 조련사는 그 개가 흑인을 증오하지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했겠지만, 그 개의 깊은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증오의 에너지를 생각했어야 했다.
증오의 에너지에 가려져 있는 생명성을 일깨워줬어야 했다. 자연스레 자란 개는 다른 생명체들을 증오하지 않는다.
학여역수(學如逆水), 배움이란 마치 물을 거슬러 배를 젓는 것과 같다.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동안 어떤 형태로 학습된 몸을 새로운 학습의 몸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런 공부를 하지 않으면 우리는 ‘인간은 고쳐 쓸 수 없어!’를 믿게 된다.
악마가 되어버린 개, 악마가 되어버린 인간, 모두 어쩌다 그렇게 학습된 존재일 뿐이다.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처럼 치열하게 다른 존재로 학습을 하면, 개도 인간도 고쳐 쓸 수 있게 된다.
그 불길 다스려 다스려
슬프도록 소슬한 몸은
현신하옵신 관음보살님
-이조항아리.
- 허영자, <백자(白瓷)> 부분
모든 생명체 안에는 생명의 불이 있다. 그 불길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의해 악마도 되고, 성자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