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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를 위하여   

by 고석근 Aug 02. 2023

 돈키호테를 위하여     


 미쳐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미친 짓은 현실에 안주하고 꿈을 포기하는 것이라오.     


 - 미겔 데 세르반테스,『돈키호테』에서          



 오래 전 이사를 갈 때, 난감했다. 큰 아이가 미술 작업실로 사용하던 지하실이 쓰레기장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바닥과 벽에 물감 튀긴 자국이 여기저기 얼룩이 져 있었다. 제대로 지워지지도 않았다.      


 ‘어떡하나?’ 다행히 이사 오시는 분들이 지하실 전체를 새로 수리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다 큰 아이가 독일로 미술 공부하러 가서 집 전체가 깨끗해졌다. 그런데 얼마 전, 아내가 내 옷장을 열어 

보더니 “쓰레기장이 되어버렸네.” 하고 말했다.     


 아내는 양말, 팬티, 런닝셔츠 넣을 자리를 구분해 놓았다. 그런데 아내가 잘 개어서 내게 주면 나는 한꺼번에 집어넣는다.     


 서로 뒤섞여 있다. 그러면 나는 필요할 때마다 여기저기 뒤적여 찾아 쓴다. 아내는 왜 이렇게 하느냐는 표정이다.     


 나는 ‘허허’ 웃고 만다. 오늘 아침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큰 아이와 나는 성격이 같다.     


 ‘돈키호테’다. 이상주의자다. 이상주의자는 현실을 바꾸려 한다. 겉으로는 잘 정돈되어 안정감 있게 보이지만, 기존의 질서들은 삶을 억누르고 있다.     


 큰 아이와 나는 무의식중에 이 딱딱한 현실을 숨 막혀한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바꾸지 못하니, 자그마한 내 공간이라도 바꾸는 것이다.     


 혼돈으로 만들어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마구 흐트러져 있는 것들에서 나의 것을 찾아내는 즐거움인 것이다.     


 나는 글을 쓰며, 그렇게 언어를 찾아낸다는 생각이 든다. 돈키호테가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스페인 라만차의 작은 마을에서 쉰 살도 넘은 하층 귀족 알론소 키하노가 기사도 소설에 빠져 있다가 스스로 편력 기사가 되어 천하를 주유하게 된다.     


 그의 꿈은 원대하다. 이 세상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는 이웃 마을의 시골 처녀 알돈사를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이름의 귀부인으로 격상시킨다.      


 여관을 성으로, 여관 주인을 성주로, 풍차를 괴물로 만든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인 것이다.     


 돈키호테는 이 세상이 붙인 이름들을 거부한다. 그 이름들에는 얼마나 속물적인 것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가?     


 이웃 마을의 알돈사를 다들 시골 처녀로 알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생각할까?     


 그 당시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귀족들이 그렇게 명명했을 것이다. 시골 사람들은 높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니 따라하고.     


 돈키호테는 이 너무나 견고해 보이던 질서를 말 한마디로 단숨에 무너뜨려 버리는 것이다.       


 “알돈사 당신은 너무나 고귀하신 귀부인 둘시네아 델 토보소입니다.” 그가 이름을 부르자 알돈사는 꽃이 되는 것이다.     


 돈키호테의 눈으로 삼라만상을 바라보자! 모든 것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너무나 고귀한 존재가 될 것이다. 이 세상 전체가 화엄(華嚴)이 될 것이다.      


 돈키호테만이 해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돈키호테인 것이 자랑스럽다. 이 세상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고귀한 것들이 있으니까.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 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 부분          



 혁명은 안 되고 방만 바꾸어 버린 시인, 하지만 그는 이 세상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얼마나 많은 것들을 바꾸었는가?     


 가벼움은 역사인 것이다.     


 나비의 가벼운 날갯짓이 어떤 태풍을 일으킬지는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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