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도전이다
유언이 끝나자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시트를 걷어붙이며 일어서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달려가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모두를 한쪽으로 밀어붙이고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창문가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창틀을 거머쥐고 먼 산을 바라보다 눈을 크게 뜨고 웃다가 말처럼 울었습니다. 이렇게 창틀에 손톱을 박고 서 있을 동안 죽음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아리 에스터 감독의 영화 ‘미드소마’에는 ‘끔찍한 죽음’이 나온다. 스웨덴의 한 공동체 마을, 낮이 가장 긴 하지, 90년마다 9일 동안 축제를 연다.
그 공동체에서는 인생을 사계절로 나눠서 본다. 0세에서 18세까지는 봄, 19세에서 36세까지는 여름, 37세부터 54세까지는 가을, 55세부터 72까지는 겨울이다.
겨울이 끝난 72세 두 노인이 자살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그들의 이름을 새로 태어나는 아기가 이어받는다.
이러한 죽음 앞에서 문명인인 우리는 누구나 충격을 받을 것이다. ‘어떻게 사람 목숨을 이렇게 할 수 있는 거야?’
축제에 참가한 한 문명인이 친구에게 말했다. “우리는 죽음을 앞둔 노인을 요양원에 보내잖아. 저들이 보면 우리보다 더 역겨움을 느낄 거야!”
어느 게 더 인간적일까? ‘더 인간적인 것’을 찾아내려면, 우리는 ‘인간이 뭐냐’는 문제를 풀어야 한다.
문명권에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를 ‘자아실현(自我實現)’에서 찾는다. 이렇게 보면, 저 공동체의 죽음은 지극히 비인간적이다.
한 인간의 마지막 삶이 너무나 괴기스럽고 폭력적이지 않은가? 어느 짐승도 저렇게 죽음을 맞지는 않을 것이다.
천수(天壽)를 존중하고, 한 인간의 마지막으로 가는 길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인간에게는 자아실현과 함께 ‘자아초월(自我超越)’의 욕구가 있다고 한다.
자아는 육체적 존재인 인간을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육체를 초월한 ‘영적인 존재’다.
인간의 몸을 언뜻 보면, 물질인 육체가 전부인 것 같지만, 이 육체는 사실 에너지장이다.
인간의 몸은 에너지장이기에 태어남과 죽음이 없다. 영원한 존재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공동체 마을의 의례를 통한 죽음이 전혀 다르게 보일 것이다.
한 인생을 다 산 노인은 죽음을 기꺼이 맞이할 것이다. 자신의 본질, 영혼은 영생이니까.
자아가 전부인 줄 아는 문명인의 삶은 어떤가? 오로지 육체의 쾌락으로 살다가 죽을 때는 얼마나 허망한가?
이제 우리는 ‘인간에게 영혼이 정말 있는가?’의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현대 양자물리학으로 보면 인간은 ‘물질의 존재(자아)’이면서 ‘에너지장의 존재(영혼)’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의 관점으로는 영혼의 문제가 풀리지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잘 사는 것’일 것이다.
지금 살아있는 건, 확실하니까. 조르바는 평소에 온전히 살았다. 실컷 살았다. 그는 죽음이니 영혼이니 이런 것들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는 게 나무나 신나는데, 무슨 죽음, 영혼 따위를 생각하겠는가? 온전히 살아온 그에게도 죽음이 왔다.
그는 온전히 살아있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아니 ‘살아있음 그 자체’로 죽어간다.
‘그는 창틀을 거머쥐고 먼 산을 바라보다 눈을 크게 뜨고 웃다가 말처럼 울었습니다. 이렇게 창틀에 손톱을 박고 서 있을 동안 죽음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조르바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머지 대다수의 문명인들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스웨덴의 공동체 마을에서 맞이하는 죽음이 더 인간적이지 않겠는가? 영화감독 아리 에스터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게 화두를 던졌다.
‘문명 이전의 아주 오래된 조상님들의 죽음에서 우리는 죽음의 지혜를 배울 수 있지 않을까요?’
어디를 찾아봐도 보이지 않음으로
여름이 가버린 걸 알 수 있듯
아, 그렇게
죽음이 시체를 남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도 속에서 질겨지는 시체들을.
- 황인숙, <가을날> 부분
‘애도 속에서 질겨지는 시체들을.’ 우리 사회에는 주검이 즐비하다. 온통 시체의 냄새다.
우리가 동물들처럼 깔끔하게 죽을 수 있을까? 산과 들, 강에는 죽음이 없다. 언제나 삶이 눈부시게 빛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