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짐승
난(蘭)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서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 신석정, <작은 짐승> 부분
내게 난(蘭)이는 외갓집의 사촌 누이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엄마 따라 외갓집에 자주 갔다.
동갑인 사촌 여자아이, 그 아이와 나는 깨진 병을 주우러 다녔다. 엿장수가 올 때, 깨진 병 조각을 갖고 갔다.
우리는 엿을 먹으며 마주 보고 웃었다. 깨진 병 조각도 엿과 바꿔먹던 시절, 참으로 포근했다.
그러다 5학년이 되었을 때, 그 아이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학교에서 가져온 옥수수 급식 빵을 그 아이한테 주려다 얼굴이 발개져 뒤안으로 갔다.
혼자 우두커니 서서 급식 빵을 우걱우걱 먹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작은 짐승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후 ‘작은 짐승’은 내 가슴 속에 깊이 숨었을 것이다. 그러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날 때, 작은 짐승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상대방도 작은 짐승이 되었다. 작은 짐승은 그 후 요정이 되고, 선녀와 천사가 되었을 것이다.
선녀와 천사는 대지모신이 되고, 관세음보살이 되고, 성모 마리아가 되었을 것이다.
가끔 내 안에서 작은 짐승이 깨어날 때가 있다. 나는 한없이 순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