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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달다 Oct 13. 2021

최선을 다하는 거북이 러너

거북이보다 느릴 지도 몰라


고등학교 체육시간.

그것도 고등학교 3학년 여자 반의 체육 시간.


아는 사람은 알 거다.

체육 선생님의 분노와, 체념과, 기대와, 기대의 으스러짐과, 한탄을 말이다.


고등학교 3학년과 선생님은 아주 묘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주요 과목을 제외한 기타 과목의 선생님들은 숱한 자조와 자괴를 느낄 수 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수능을 준비한다는 핑계 아닌 핑계로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자습을 원하고,

분명히 필요한 과목임에도, 수능에 들어있지 않은 혹은 선호도가 낮은 과목 선생님은

내 과목을 내 과목 시간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현실에 순응하기도 하며 반항하기도 하며 지내는 그런 시간을 보낸다.


대한민국 고3의 현실이란 그런 것이다.


여하간,

그럼 나는 어떠한 학생이었냐고 하면,

그래도 그 수업 시간에는 그 수업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나는 이과를 나왔는데, 이과 수업의 대부분이 내가 좋아하는 과목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딱히 수업을 안 들을 이유도 없었다. 내가 시험으로 선택하지 않은 과목도 그냥 그 공부를 한다는 자체가 참 재미있었다.

그리고 예체능 과목은 뭐 일주일에 몇 시간밖에 없는데, 일주일 중 짧은 시간 수능 공부를 하기보다는 그 시간을 충실히 하는 게 더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래서 국어 시간에는 국어를, 음악 시간에는 음악을. 체육 시간에는 체육을 열심히 참여했다.


전국의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그리고 고3을 지나온 사람들.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면 그러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을 거다.


그 와중에 생활 체육이 보편화되어있지 않은 우리나라 체육시간, 그것도 고등학교 3학년 여자 학반이면 말 다한 거다. 요즘 유행하는 유미의 세포들처럼 이야기해보자면 '대충 세포'와 '무기력 세포'가 활개 치는 장소이지 않을까.


고3이어도 교육과정은 정석대로 편성되어있을 테기에 고3이어도 각 체육 부문의 수행평가를 보아야 한다.

그날도 뜬금없이 8자 달리기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행평가를 봤다.

그날 체육 선생님이 참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셨다.


나는 체육 선생님이 기분이 좋지 않으신가보다 하고 내 차례를 기다려 달리기 수행평가를 했다. 내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체육 시간이라서 대강한다거나 했던 적은 원래도 없었고, 그날도 없었다.


그런데 체육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아주 안 좋은 얼굴로 말이다.

최선을 다해서 달리기를 하고 숨을 고르던 나는 어리둥절 선생님 앞으로 갔다.


선생님이 굉장히 짜증이 나는 표정으로 내게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제대로 안 뛸래?!"

나는 더 어리둥절해서, "저 제대로 뛰었는데요?" 했다.

정말 진심으로 어리둥절했다.


왜냐면  난 그때 근 1년 들어 가장 최선을 다해 달렸기 때문이다. 달리고 나서 스스로 오랜만에 열심히 달렸다며 뿌듯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때 내 말과 표정을 보고 선생님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던 거도 기억이 난다.


"그래 알았다." 하고 가라는 제스처를 했는데.


제자리를 돌아가면서도 참 억울했다.

그 일은 지금에도 자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내게 꽤나 강한 인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 체육선생님이 나빴다던가 하는 생각은 아니다. 그 보다는 오히려 선생님이 참 마음 고생하셨겠다. 하는 인상으로 남아있다.


나는 그랬을지 몰라도 대다수의 학생들이 정말 대충 뛰었기 때문이다. 그때 선생님은 화가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운좋지 않게 달리기가 (원래) 느린 내가 눈에 띄었을 뿐이다. 걷는 것도 아니고, 뛰는 것도 아니고, 촐랑촐랑 뜀 걷기를 하는 얼렁뚱땅 쟁이들을 쳐다만 보는 게 쉬운일이 아니다.


그 와중에 최선을 다한 거북이에게 화를 낸 건 선생님의 실수였지만 말이다. 


지금에서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내가 달리기를 할 때마다 그때의 최선을 다한 내 거북이 달리기가 생각 나서다. 그때는 억울했지만, 지금은 내가 얼마나 느렸으면 선생님이 그렇게 생각했을까 웃음이 난다.


나는 2주 정도 전부터 달리기 어플로 산책 비슷한 하지만 나에게는 달리기인, 조깅을 시작했다.


여전히 내 몸뚱이는 평균보다 많이 못하다. 운동을 나름대로 꾸준히 하고는 있지만 요가나 필라테스 같은 정적인 운동을 깔짝거리다 마는 삶을 살고 있는지라 달리기를 할 기회가 없다. 요가나 필라테스보다 더 동적인 운동을 해보려 해도 기본 근력이 없으니 시도 조차 하기 어렵다. 진짜 근육이 찢어져서 말이다. 원래 운동하는 사람보다 운동 안 하다 하는 사람이 더 많이 다친다.


그래서 조깅을 시작했다.


요즘은 개인 코칭 달리기 어플도 꽤 많이 나와있어서, 손쉽게 조깅을 코치받으며 시작할 수 있었다. 기초 걷기 근력을 높이려 첫 며칠은 만보 걷기를 하고, 그다음부터 30분 달리기 초심자 코스를 등록해 차근차근해 나가는 중이다.


2주를 넘게 한 소감은 역시나 나는 달리기를 못하는구나 였다.


빠르게 걷는 사람들과 거의 같을 정도로 느린 달리기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인지할 때면 그때 선생님의 화남이 생각나 자조적인 웃음이 지어진다.


근데 고작 2주인데도 뛰기 시작하니 그런 자조적인 웃음도 마냥 좋다.

못하는 내 모습이 더 좋다.

선생님에게 혼났던 걸 스스로 해야겠다고 다시 생각하며 즐겁게 하고 있는 이 모습이 참 좋다.


정말 정말 못하는 달리기이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꾸준히 하면 100% 잘하게 되어있는 게 달리기다.

그런 생각이 드니까 참 좋았다.

내가 가장 못하는 무언가를 꾸준히만 하면 내 모습이 무조건 바꿜거니까.


일주일 조금 더 밖에 달리기 하지 않은 조깅 하룻강아지이지만,

묘하게 달리기라는 아주 원초적인 운동의 매력에 빠졌다.


그러니 그때의 그 선생님께 말씀 드려본다.

선생님, 저 그래도 달립니다!


내일은 새 조깅화를 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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