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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 아티스트 Feb 22. 2024

그가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는' 이유

'카탈스러운'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는 뉴스구독플랫폼 '스프'에 쓴 글https://premium.sbs.co.kr/article/np6T86e1jyo입니다. 피아노 관련이라 옮겨왔습니다. 


피아노를 갖고 다니는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얘깁니다. 1956년 폴란드 태생. 1975년 18살의 나이로 쇼팽 콩쿠르에 우승하면서 데뷔한 이래, 쇼팽 외에도 다양한 레퍼토리에서 완벽에 가까운 연주를 들려주며 지금까지 세계 최고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지메르만은 완벽주의자이며 까탈스러운 면모로 유명합니다. 요즘은 클래식 음악회에서도 커튼콜 때는 사진 촬영을 허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지메르만의 연주회라면 예외입니다. 사진 촬영 녹음 녹화 모두 절대 금지입니다. 2003년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첫 내한공연에선 무대 천장에 설치된 마이크를 보고 녹음한다고 오해해 직접 마이크 줄을 자르려고 해서 공연장 직원들이 기절초풍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2013년 독일에서 연주할 때는 한 관객이 카메라폰으로 찍고 있는 걸 발견하고 공연을 중단한 적도 있습니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함께 레스피기 소나타를 녹음할 때 피아노 위치를 10번이나 바꾼 것도 유명한 일화입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음향이 어우러지는 최상의 위치를 찾기 위해 그랬다는데, 정경화는 녹음을 마치고 그야말로 녹초가 되었다고 하죠.


<그는 피아니스트이자 엔지니어?>

그랜드피아노에서 피아노액션을 꺼내는 모습(출처유튜브 Upcycle Piano Craft) 


지메르만의 까탈스러움은 자신이 연주하는 악기, 피아노에 관해서는 최고 수준입니다. 다른 악기 연주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악기를 갖고 다니면서 연주하지만, 피아니스트는 보통 그 공연장에 있는 피아노를 연주합니다. 피아노는 부피도 무게도, 갖고 다니기엔 너무나 불편한 악기이니까요. 그런데 지메르만은 피아노를 갖고 다닙니다. 피아노를 통째로 가져가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피아노 건반과 액션(건반과 연결되어 피아노의 현을 때리는 장치)은 갖고 갑니다.  


*공연장에서는 보통 ‘콘서트 그랜드’로 불리는 대형 그랜드 피아노를 사용합니다. 야마하, 파지올리, 가와이, 벡스타인 등 여러 브랜드가 있지만,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스타인웨이의 ‘콘서트 그랜드 D-274’라는 모델은 신품 정가가 2억 5천만 원, 길이 274cm, 폭 156cm, 무게 480킬로그램에 이릅니다.


스위스 바젤에 거주하는 지메르만은 비행기 타는 걸 싫어해서 연주 여행도 웬만하면 차편으로 다닙니다. 주로 목재로 만들어진 피아노는 온도와 습도에 민감하죠. 비행기를 이용하면 피아노는 화물칸에 실어야 하는데 화물칸의 극히 낮은 온도가 피아노에 안 좋은 영향을 준다는 겁니다. 그는 피아노를 싣고 내리기 편하게 개조한 전용 밴을 갖고 있는데, 공연이 끝나면 바로 커다란 피아노 몸체를 해체해 차에 싣고 밤새 다음 목적지로 달립니다. 운전수를 따로 고용하지만 자신이 직접 운전할 때도 많습니다.


피아노는 복잡한 '기계장치'이기도 합니다. 지메르만은 어린 시절 이미 건반을 직접 제작해 본 경험이 있을 정도로 피아노의 '메커니즘'에 통달했습니다. 1970년대 초반, 그가 자란 폴란드 남부 지역에선 피아노 부품을 만들거나 수리하기가 쉽지 않았고, 그런 기술을 익힌 덕분에 부수입도 올릴 수 있었다고 하네요. 그 자신이 피아니스트이면서 테크니션 혹은 엔지니어이기도 했던 겁니다.


지메르만이 연주하는 곳에는 전문 조율사가 동행하지만, 지메르만 자신도 직접 피아노를 해체, 조립하고 조율합니다. 그는 각종 공구를 사용해 자신이 연주할 공연장의 음향 특성, 그리고 연주할 곡의 특성에 따라 피아노를 정교하게 조정합니다.


<한국에 공수해 온 '스타인웨이 파브리니'>

지메르만이 연주한 '파브리니(Fabbrini)'


지메르만의 이번 한국 공연에는 피아노 한 대와 건반 액션 한 세트가 왔습니다. 지난번 한국 공연에는 건반 액션만 가져와서 롯데콘서트홀이 보유한 스타인웨이 피아노에 장착해 썼지만, 이번에는 '스타인웨이 파브리니' 피아노 한 대를 통째로 공수해 왔습니다. 어차피 건반 액션은 가져오니까, 몸체가 될 피아노는 한국에 있는 스타인웨이 피아노 아무거나 써도 되는 거 아닌가 했는데, 그것도 맞는 것 안 맞는 것이 있어서 까다롭다고 하네요.


'파브리니(Fabbrini)'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피아노 그룹 이름입니다. 3대째 피아노 조율과 수리, 개조에 종사하는 장인 가문이고 피아노 딜러이기도 하죠. 스타인웨이 파브리니는 스타인웨이 피아노 중에서도 파브리니의 손길이 닿은 제품인데, 자동차 성능을 끌어올리기 위해 하는 다양한 작업들을 '자동차 튜닝'이라고 하는 것처럼 파브리니도 스타인웨이에 그런 작업을 해서 특별하게 만들어낸 피아노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지메르만뿐 아니라 스타인웨이 파브리니를 선호하는 피아니스트들이 많은데요, 마우리치오 폴리니 같은 경우는 연주용 피아노로 오직 파브리니만 고집해서 전용 파브리노 피아노가 있습니다. 폴리니 역시 피아노를 연주 여행에 갖고 다닙니다. 파브리니처럼 스타인웨이에 이름을 덧붙인 브랜드가 또 있는데요, 스타인웨이 파사도리입니다. 파사도리(Passadori) 역시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피아노 장인 가문입니다. 


*부소니 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박재홍이 콩쿠르에서 연주했던 피아노와 '파사도리 선생님' 이야기도 흥미진진합니다. '피아노는 '그것'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쓴 브런치스토리https://brunch.co.kr/@100curtaincalls/6 를 참고하셔도 좋겠습니다.  

스타인웨이 파브리니 운반하기(마스트미디어 제공) 

이 스타인웨이 파브리니는 지메르만이 지난해 독일 공연에서 선택해 연주한 피아노였는데요, 내한공연을 열흘 앞두고 항공편으로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피아노는 해체한 상태로 상자에 넣어 비행기 화물칸에 싣습니다. 낮은 온도의 화물칸에 실려왔기에 넉넉한 적응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이 피아노는 지메르만이 머물렀던 경남 밀양의 한 산속 펜션으로 옮겨졌습니다.


지메르만은 지난해 11월 3일부터 12월 16일까지 10회의 일본 공연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 왔습니다. 일본엔 지메르만이 종종 쓰던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있어 건반 액션만 가져갔는데요, 그는 건반 액션을 비행기 화물칸에 넣기 싫어서 배멀미를 감수하고 배편으로 한국에 왔습니다. 내한공연 일정은 그래서 지난해 12월 27일 부산에서 시작해, 대전 대구 서울로 올라오도록 짜였습니다.  


<피아노만 충족되면 다른 건 상관없어>


해체되어 들어온 피아노를 다시 조립하고, 조율하는 것은 연주 여행에 동행한 파브리니 소속 조율사뿐 아니라 지메르만의 일이기도 합니다. 지메르만은 공연 전까지 밀양의 펜션에서 머무르며 피아노와 씨름했는데, 여기엔 공연에서 연주할 곡을 연습하는 건 물론이고 원하는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피아노를 완벽한 상태로 만들어놓는 일도 포함됩니다. 피아노를 공연장으로 이동시키려면 해체와 조립 과정이 반복되는데, 공연장에 아침 일찍 도착해 피아노를 다시 조립하고 조율할 때는 자신과 조율사 외에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합니다.


내한공연 주최사인 마스트미디어 김용관 대표는 '지메르만은 피아노와 관련된 요구만 충족되면 숙소나 식사 같은 건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피아노만 넣어주면 어디서나 잘 자고 아무거나 잘 먹는다는 겁니다. 2022년 내한공연 때는 7일간의 자가 격리 기간 동안, '피아노와 함께' 숙소에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배달 치킨 메뉴를 10회 가까이 주문해 먹을 정도로 좋아했다고 하죠. 그리고 피아노를 실은 밴을 직접 운전해 한국의 고속도로를 누볐습니다.


이번 내한에서는 밀양 숙소를 거점으로 공연이 열린 부산과 대전, 대구, 서울을 오갔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밴을 직접 운전해 이동했는데요, 기사가 있어도 옆에 앉혀두고 자신이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고 합니다. '공연을 하면 아드레날린이 많이 분출돼, 운전을 하면서 진정시켜야 한다'고 했다네요. 식사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돈가스, 라면 같은 걸로 때워도 오케이였고요.


<런던심포니 창고에 피아노와 함께 격리>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었던 2020년,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곡을 녹음했던 때의 일화도 인상적입니다. 당시 지메르만은 락다운 상태의 런던에 도착해, 여러 대의 피아노, 건반 액션 세트들과 함께 런던 심포니 창고에 들어가 격리 기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창고에서 지내면서 여러 대의 피아노를 다섯 곡의 피아노 협주곡 각각에 맞는 상태로 '커스터마이징'했습니다.


녹음이 시작된 후에도 지메르만은 해머를 이 건반에서 저 건반으로 옮겨보고, 때로는 건반에 톱질까지 하면서 피아노와 씨름하느라 밤을 새기도 했습니다. 모두 가장 완벽한 소리를 얻어내기 위한 집요한 노력이었던 거죠. 지메르만은 2021년 ‘Pianist' 매거진과 한 인터뷰에서 '정말 좋은 경험이었지만 거의 한 달을 머무르면서 이 많은 피아노들의 수준을 유지하는 게 어려웠다'고 했습니다. 또 '밤에 내가 피아노로 50년 동안 익힌 사운드와 온갖 트릭을 시험하는 광경을 본다면 믿을 수 없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지메르만이 왜 피아노를 갖고 다니냐는 질문에 대해 답했던 인터뷰가 있어서 옮겨와 봅니다.

▶ 2017년 7월 연합뉴스 인터뷰 


"플루티스트에겐 왜 본인 악기를 들고 다니는지 묻지 않으면서 왜 피아니스트들에게만 같은 질문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좀 더 진지하게 답변을 해보자면, 제가 언제나 피아노를 직접 갖고 이동하진 않습니다.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 탄생한 작품들을 연주할 때만 제 피아노를 가져갑니다. 예를 들어 요즘 연주하고 있는 번스타인(1918~1990) 작품들은 지금의 피아노로 연주할 목적으로 쓰인 곡들이라 굳이 제 피아노를 준비하지 않습니다. 쇼팽, 슈베르트, 베토벤, 브람스 같은 작곡가 시대의 피아노와 지금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는 완전히 다르므로 악기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까탈스러움이 최고를 만든다>

유튜브 DG 채널 화면 캡쳐 


지메르만의 내한공연을 앞두고 주최 측은 관객들에게 정숙 관람, 촬영 금지를 다른 때보다 더 특별히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공연 시작 전에는 '초긴장 모드'였습니다. 객석에서 소음이라도 나면, 어디서 벨소리라도 울리면 그냥 나가버리는 거 아닌가? 우리 모두 꼼짝 않고 '시체 관극'해야 하는 건가? 했었습니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되자, 일부러 그러려고 하지 않더라도 숨을 죽이고 무대에 초집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만큼 연주가 좋았으니까요.


게다가 지메르만은 무대 위에서 까탈스럽기는커녕 유머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요, 첫 곡이 끝나자 자신이 먼저 기침을 하고는 객석에도 마음껏 기침하라는 듯 손짓해서 객석에 '기침 떼창'과 함께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고요, 더 이상의 연주는 힘들다는 듯 지쳐 쓰러지는 동작을 해 보이고 들어가더니 다시 나와서 앙코르 연주를 더 선사했습니다. 


지메르만이 연주를 마치고 피아노를 툭 치고 들어가는데, 마치 '수고했다'며 동료의 등을 두드리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이 스타인웨이 파브리니 피아노는 한국 다음 중국으로 이어진 지메르만의 연주 여행에 동행했습니다. 중국 투어가 끝나고 나면 이 피아노는 다시 한국에 돌아옵니다. 앞으로 지메르만이 공연하러 한국에 올 때마다 그의 '동료'가 될 예정입니다.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까탈스러움'은 최고의 연주를 만들어내는 힘이었습니다. 자신이 연주하는 피아노라는 악기를 속속들이 알고, 최고의 소리를 만들기 위해 칠순을 앞둔 지금도 쉬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피아노를 갈고 닦고, 자신을 갈고 닦습니다. 그의 '완벽주의'에 존경심이 생깁니다. 지메르만의 '까탈스러움' 덕분에 공연 커튼콜 사진 하나 없지만, 공연 시작 전에 찍은 무대 위 피아노 사진 한 장은 남았습니다. 그의 손길이 닿았던 스타인웨이 파브리니. 지메르만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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