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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육수 Jul 31. 2024

편의점

연재소설

14. 편의점


센터 수업을 마친 뒤 집으로 바로 들어가려다 수인은 아차차 발걸음을 돌린다. 집으로 가는 줄 알았던 준후는  엄마의 노선변경에 당황해 끙끙거리자 수인이 준후의 손을 끌며 말했다. 

“편의점 가야지.”


사회성 그룹 수업 선생님이 준후의 사회성을 높이기 위해 가게에 가서 물건 사는 연습을 한 번씩 해보란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요즘은 마트에선 키오스크로 계산하고 무인 가게도 많아져 점원에게 인사하고 말을 할 수 있는 곳이 없는데 그나마 편의점에는 점원이 있고 집에서도 가까워 준후가 물건 사는 연습하기에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상가에 있는 24시간 편의점 문을 여니 알람벨 소리가 울리며 동시에 “어서 오세요.” 기계음 같은 인사 소리가 들렸다. 카운터에 아무도 없어 어디서 소리가 났지 싶었는데 곧 냉장고 옆 창고 문에서 편의점 브랜드 로고색의 조끼를 입은 여자가 나왔다. 


20대 중반쯤 됐을까, 긴 머리를 질끈 묶고 자외선의 공격을 받지 않은 듯 하얗다 못해 허옇게 질린 피부가 인상적인 여자였다. 그 직원을 수인은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밤늦게 준후가 열이 나는데 하필 집에 해열제가 없었다. 이 시간까지 문 연 약국은 없을 테고 어쩌지 하다 편의점에 안전상비의약품을 판다는 게 생각나 부리나케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그때 다급한 수인과는 달리 아무 표정 없이 느긋하게 어린이 해열제를 꺼내준 게 그 직원이었다. 


그 직원은 동그란 안경 너머 무미건조한 눈으로 편의점에 들어온 준후와 수인을 쳐다보며 카운터에 섰다. 평소 그 편의점은 라면 먹으며 학원 차 기다리는 학생들이며 담배와 음료수를 사는 아파트 주민들로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하지만 밖이 어둑어둑해진 이 시간에는 아무도 오지 않고 한산했다


편의점에 들어가자마자 과자코너로 돌진하는 준후를 간신히 붙잡고 직원을 향하게 준후의 몸을 세운 다음 손으로 고개를 눌러 인사를 시켰다. 


“안. 녕. 하. 세. 요? 해봐.”

“안...하세오오..”

수인이 슬쩍 직원 쪽을 쳐다보니 직원은 인사하는 준후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포스기 앞에 놓여 있는 껌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었다. 


“준후야, 네가 먹고 싶은 거 들고 와봐.”

인사시킨 후 수인이 그제야 손을 놓아주자 준후는 곧장 과자코너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칸쵸를 집어 왔다. 준후는 한 가지 과자에 꽂히면 한동안 그것만 먹는데 이번에는 칸쵸에 꽂혔다. 계산도 하지 않고 봉지를 뜯으려는 걸 막고 수인은 준후를 카운터 앞으로 끌고 갔다. 


카운터에는 ‘공무원 필수 영단어 1000’이란 책이 안에 펜을 넣어놨는지 불룩한 채 놓여 있었다. 직원이 그 책을 옆으로 치우며 바코드 리더기를 칸쵸에 갖다 대려 할 때였다.


“준후야, 계산해 주세요 해봐. 계. 산. 해. 주. 세. 요”

수인은 준후의 손에 카드를 쥐어주고 뒤에서 준후 팔을 잡으며 카드를 내밀게 했다. 수인이 한 말에 준후가 뭉개진 발음으로 “개에상?” 이렇게 따라 하자 직원이 이상하다는 듯 수인과 준후를 번갈아 쳐다봤다. 

“천 원입니다. 카드는 단말기에 꽂아주셔야 하는데...”

카드를 단말기에 꽂는 대신 고집스레 팔을 뻗고 있는 준후를 보며 직원은 당황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수인은 대신 카드를 단말기에 꽂으며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직원에게 말했다. 


“저희 아이가 물건 사는 연습을 하고 있거든요. 저희 애가 좀 느려서 물건 사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괜찮으시다면 여기서 해도 될까요? 물론 사람 많이 오는 시간은 피하고 일하시는데 방해 없도록 하겠습니다.”


내 돈 주고 내가 물건을 산다는데 이렇게 굽신거려야 되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지만 한편으론 직원분이 당황하고 성가셔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수인은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직원은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알겠다 하며 의외로 선선히 답했다. 아무렇지 않은 직원의 반응에 오히려 수인이 허탈해졌다. 


준후가 자폐 진단을 받은 뒤로 수인은 밖에 나갈 때마다 구구절절 말이 많아졌다. 준후가 돌발행동을 하기 전인데도 지레 겁을 먹고 수인은 사람들에게 “아이가 발달이 느려서요. 아이가 어디 안 좋아서요.”란 말을 보험처럼 늘어놓았다. 그런 말을 미리 해놔야 사람들이 덜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았고 수인도 마음이 놓였다. 준후가 어떤 상태든 자신과는 별로 상관없다는 직원의 태도에 괜히 긴장한 자신이 민망할 정도였다. 


다음 날도 준후와 수인은 어제와 같은 시간에 편의점을 찾아갔다. 밖에서 편의점 유리 안을 살펴보니 아빠와 네, 다섯 살쯤 보이는 여자 아이가 카운터에서 계산하고 있었다. 수인은 바로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려는 준후를 간신이 붙잡고 그들이 편의점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아빠와 아이는 사이좋게 아이스크림을 날름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편의점에서 그들의 뒷모습이 멀어지는 걸 본 수인은 그제야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어제와 똑같은 단조로운 그녀의 인사말이 들렸다. 준후의 고개를 숙이게 하며 수인이 카운터 쪽을 흘끗 보니 어제와는 달리 그녀는 준후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 하세요?”

“안녕!”

수인은 깜짝 놀랐다. 준후가 인사해도 별 반응이 없을 것 같던 그녀에게서 안녕이란 말이 튀어나올 줄 상상도 못 했다. 특히 가면처럼 고정되어 있는 줄 알았던 그녀의 입술이 살짝 올라간 모습에 잘못 봤나 싶을 정도였다. 준후가 칸쵸를 들고 오자 그녀는 칸쵸에 바로 리더기를 갖다 대는 대신 준후를 빤히 쳐다봤다. 마치 준희의 말을 기다리는 듯했다. 


“개상... 주세요!”

수인의 도움을 받아 준후가 말하자 직원은 그제야 바코드를 찍고는 “천워언 입니다아.”하며 입모양을 크게 하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그리고는 손을 펴서 카드를 달라는 손짓을 했다. 항상 기계처럼 인사하고 바코드를 찍고 언제나 차가운 인상의 그녀에게 그냥 다른 손님한테 하는 것처럼 준후도 똑같이 대해줘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적극적인 호의에 수인은 고마우면서도 살짝 당황스러웠다. 이 여자가 우릴 불쌍하게 생각해서 이러나 싶은 자격지심도 설핏 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준후의 사회성을 키우는 게 급선이다. 


저번 아웃렛에서 준후가 어떤 여자분의 엉덩이를 만진 사건 이후로 수인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타인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본능대로만 하는 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저 엄마 눈치만 살피는 준후가 안타깝고 답답했다. 그렇다고 집안에만 꽁꽁 묶어 둘 수만은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세상의 규칙을 지키며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는 센터 선생님의 말씀에 수인은 마음을 다잡았다. 


“아, 그리고”

인사하고 편의점을 나서려는데 직원의 목소리가 뒤에서 붙잡았다. 

“사람이 안에 있어도 들어오셔서 해도 돼요. 저녁에 춥잖아요.”

아마 밖에서 사람들이 나오길 기다리던 그들을 직원이 본 모양이다. 수인은 왠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면서 얼른 편의점을 나왔다. 어쩌면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일주일, 한 달, 두 달 정도가 지났다. 


이제는 수인이 가자고 말을 안 해도 준후가 먼저 편의점에 가자고 졸랐다. 편의점에 들어가면 ‘안녕하세요?’라고 말해야 하는데 준후는 헷갈리는지 계속 “안녕히 계세요?”라고 말한다. 

“어머, 안녕!”

처음 안경 너머 무미건조한 시선을 보낸 직원은 이제 어느 누구보다 반갑게 준후를 맞이해 준다. 어떤 날은 매대에 물건을 정리하다가도 준후가 인사하면 환하게 웃으며 카운터로 달려왔다. 


준후가 저번에는 칸쵸만 주야장천 고르더니 이제는 바나나우유에 꽂혀서 곧장 냉장고 쪽으로 달려가 바나나우유를 집고 카운터 앞으로 왔다. 

“...”

준후가 바나나우유를 카운터에 놔두고 딴짓을 하자 직원이 준후와 눈 맞춤을 하며 입모양으로 ‘계. 산’이라 했다. 

“계산해 주세요!”

직원의 힌트에 준후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고 직원은 그런 준후가 기특한지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바나나우유 마시는데 정신이 팔려 직원의 “잘 가.”하는 소리를 못 듣고 준후가 쌩 나가버리자 직원은 수인에게 머쓱한 듯 어깨를 살짝 올렸다 내렸다. 어느새 그 직원과 내적 친밀감이 생긴 수인은 그녀가 정말 머쓱해서 그런 게 아니란 걸 안다. 


‘내일은 인사도 잘하겠죠.’

‘준후, 잘하고 있어요.’

그녀는 눈빛으로 준후와 수인을 응원했다. 그런 그녀가 고마워 수인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선에서 커피나 음료수 1+1 행사상품이 있으면 사서 하나를 그녀에게 건네주었고 그녀도 재고가 남는 츄파춥스 사탕을 준후에게 한 번씩 주곤 했다. 


그 직원을 보며 수인은 어쩌면 자신이 큰 착각을 한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기들은 사람들에게 항상 차가운 시선과 무분별한 동정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수인 본인의 시선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편의점 직원처럼 사람들은 따뜻한 시선으로 준후를 지켜봐 주고 언제든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태로 그들을 응원해주고 있었다. 


준후가 편의점에서 이 정도 할 수 있는 게 다 그 직원 덕분이라 수인은 그녀에게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항상 카운터에 펼쳐 있는 공무원 수험서를 보니 그녀는 일하면서 공무원 시험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오롯이 공부만 해도 힘들 텐데 이렇게 돈 벌면서 틈틈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니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그녀가 힘을 낼 수 있도록 영양제를 주문하고 조그만 카드도 준비했다. 


카드에 아이에게 잘해줘서 고맙고 앞으로 힘내서 원하는 바대로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구구절절한 말을 쓰려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수인은 카드에 옅은 색연필로 ‘고맙습니다♡’라고 쓴 뒤 준후에게 따라 써보게 했다. 뒤에서 같이 손잡고 쓰는데도 글씨가 영 삐뚤빼뚤해 무슨 글씨인지 도통 알 수 없지만 준후가 직접 감사의 말을 쓰는 게 맞는 것 같았다. 하트 안에 빨갛게 색칠도 한 뒤 곱게 접어 봉투에 넣었다. 


“선물이랑 카드 그 편의점 누나한테 주자, 알았지?”

카드와 선물을 준후 손에 꼭 쥐어준 후 편의점 문을 열었다. 알람벨 소리가 울리고 창고에서 직원이 나왔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준후도 누나가 아닌 아저씨가 나오는 모습에 당황했는지 편의점 안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혹시 원래 이 시간에 일하시는 분은 오늘 안 나오시나요?”

“아뇨. 급한 일이 생겨서 얼마 전에 그만뒀어요.”


수인은 당황스러웠다. 무슨 급한 일이기에 갑작스럽게 그만둔 건지 꼬치꼬치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저씨도 그런 질문을 하는 수인을 이상하게 여길까 봐 관두기로 했다. 시험날짜가 얼마 남지 않아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그만둔 걸까. 아님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좀 더 빨리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걸 그랬나 보다 하고 수인은 아쉬운 마음에 선물을 만지작거렸다. 준후도 낯선 사람이 카운터에 서있어서 그런지 바나나우유를 집어와 카운터로 가지 않고 수인에게 다가왔다. 여자 직원이 있을 때는 “감사합니다.”란 말이 유창하게 나왔지만 그새 까먹은 건지 준후는 바나나우유를 들고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예상하지 못한 헤어짐에 서운함이 밀려왔지만 그녀도 여기에 평생 있어야 할 의무도 없고 오히려 그녀에겐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수인은 그런 좋은 사람이 시험에 꼭 합격해서 좋은 공무원이 되길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며 기도했다. 달빛이 은은하게 수인과 준후를 비춰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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