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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서 Jun 08. 2023

[탈존과 세계] (23. 6. 8. 수정)

도구로써 거울을 고찰함


탈존과 생명

“나는 왜 여기 있는가?”라는 물음은 ‘몸’의 삶을 묻는 방식이다. 우리는 왜 여기 있는지 모른 채 여기 있다. 세계의 흐름 속에 만들어진 ‘몸’들은 유영 속에서 목적 없이 탄생한다. 탄생은 사건으로 우리에게 해석되지 필연적 법칙으로 해석될 수 없다. 탄생은 무조건 개인에게 떠넘겨진다. 우리의 의지 작용, 결정, 사고 등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은 채 한 개인은 탄생하게 된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탄생에서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발견하려 하는데, 우린 그냥 태어난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임신이 이루어지고 출산이 일어났을뿐더러, 이러한 임신도 부모님이 직접 관여할 수가 없다. 무조건 정자가 난자와 결합하지도 않고, 착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출산까지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과정에 우리의 의지는 없다. 죽음이라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린 흔히 자살로 죽음을 스스로 선택해서 극단적 방법을 통해 생을 마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살적 행위를 했다고 해서 무조건 죽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10층에서 떨어졌는데 차 위에 떨어져 목숨을 부지하는 경우나 독극물을 마셨지만, 몸에 반응이 없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 외에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는가? 사고사, 추락사 등 우리가 차에 뛰어들거나 난간으로 몸을 던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들이닥치는 사고로 죽게 된다. 탄생과 죽음 모두 우리에게 사건이다. 그러면 우린 왜 태어났는지도 왜 죽는지도 정확하게 짚어내거나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려고 하는 것은 내가 왜 지금의 얼굴로 태어났는지, 왜 내 엄지손가락은 이러한 길이를 갖게 되었는지를 묻는 것과 같다. 그것은 계속해서 원인을 소급해나가는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으며, 명확하게 이것이 원인이라고 집어낼 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린 탄생과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오히려 우린 이런 질문에서 벗어나야 한다. 목적 없이 탄생과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세계 속의 ‘몸‘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생명‘은 세계의 흐름 속에 이유 없이 만들어지는 사건이다.

문명과 도구

도구는 생명과 다른 곳에 있다. 도구에게는 여기 있는 이유가 있다. 세계는 흐름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새로운 사건들이 만들어지지만, 문명은 그 목적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고정시킨다. 문명 아래에서 만들어진 것들은 존재이유와 맥락을 부여받고, 그거에 맞게 각 도구들을 이해해야 한다. 카페에선 커피를 만들어야 하고, 앉아야 하고,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건이 고정된 장소에 놓인 것들이 도구이다. 카페에 있는 의자, 커피머신, 컵, 책상 모두 스스로 카페에 간 것이 아니다. 도구는 거기 있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도구가 된다. 그리고 문명은 하나의 목적을 가진 공간으로 모든 것이 설계되고, 이유가 있는 탄생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그들의 파괴도 이유 있게 된다. 필요로 만들어져서, 쓸모없어지면 버려지는 것들이 바로 도구이다. 그들의 창조와 파괴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이는 운명과도 같다. 그래서 그들에겐 존재이유가 부여되는데, 이는 목적론적 관점으로 바뀌고, 각 사물엔 본질이 있다는 생각을 만들어낸다. 사건이 벌어지지 않고, 고정되기 때문에 마치 고정된 사건이 하나의 객체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고, 그곳에 자리가 마련된다. 이는 사물의 본질로써 그 도구가 존재하는 이유를 밝히고, 도구에게 벌어지는 사건을 고정시킨다. 거울을 생각해보자. 거울을 보면 우린 여기 서 있는 내가 진짜이고, 거울에 비친 모습이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거울이 비치는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무언가가 비친다는 본질은 비치는 대상이 실재이고, 거울 위의 상은 허구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내 모습과 거울 보고 있는 나 중에서 왜 여기 있는 나를 진짜라고 믿어야 하는가? 이것은 나의 실재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거울이 비친다는 본질을 가진다는 점에 달려있을 뿐이다. 거울이라는 도구를 존재이유에서 벗어나 바라보자. 무언가 비친다는 사건은 내가 거울과 함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사건일 뿐이다. 만약 온 세계에 수증기가 가득해서 모든 거울에 김이 서려있다면, 우린 모든 거울을 보고도 자신의 모습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거울에 무언가가 비친다는 건 내가 거울과 마주쳤을때만 발생하는 사건 중 하나이지, 거울의 본질이 아니다. 하지만 우린 거울에 존재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울을 보면 내가 비친다고 생각하고, 거울에 비춰진 상을 거짓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우린 거울을 볼때마다 자신의 모습이 어제와 다르게 생겨도 거울의 본질로부터 나의 얼굴을 받아들이게 한다. 내 얼굴이 매일 다르게 생겨도 거울을 바라보는 주체가 실재라는 생각은 거울을 보고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만약에, 거울을 태어나서 한번도 보지 않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면, 단순히 나로 존재하면서 나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나의 존재조차 하나의 사건으로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논증을 통해 절대적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인간은 탈존하기 때문에, 존재이유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거울은 화장실에 있기 때문에 거울이 된다.

나르키소스

나르키소스는 끝까지 자기 얼굴을 몰랐다. 아마 알았다면, 물에 비친 모습이 자기라고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르키소스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으면서 정작 자신의 얼굴은 끝까지 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를 죽게 만든 네메시스의 저주는 나르키소스가 거울을 보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거울을 본 나르키소스는 자신이 볼 수 없는 유일한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나르키소스는 거울이란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즉, 무언가에 얼굴이 비춰진 적이 없기 때문에 강물에 자신이 얼굴이 비춰진다는 사실을 몰랐던게 아닐까? 그는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몰랐던 것일까? 거울에 자신이 비춰진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일까? 자신의 모습을 안다는 것은 무언가에 얼굴이 비춰진 상을 봤다는 것이고, 그 반대도 똑같다. 자신의 얼굴이 비춰진다는 사건을 마주할 수 없었기에, 나르키소스는 자신의 얼굴을 절대 알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나르키소스가 봤던 시냇물이 녹조 가득했다면, 그는 얼굴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그를 죽게 만든건 그가 얼굴을 봤다는 사건, 그리고 강물에 얼굴이 비춰졌다는 사건이다. 신의 저주는 그에게 이런 사건을 강요하게 했다. 사건을 강요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본질로 빠져들게 한다. 그러므로 도구는 신의 저주처럼 우리에게 사건을 강요한다.

얼굴과 표정

‘몸’은 감정을 느끼는 것에서만 끝나지 않고, 표정으로 그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주체성에서 벗어난다. 우린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표정을 짓고, 그것은 얼굴에 나타난다. 표정은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타자와의 소통을 위한 창구가 된다. 그러므로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이 경험주의 맥락에서 유아론을 옹호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단지 인간이 경험적 지식을 통해서 지식을 축적하고 감정을 통해서 내적 활동을 하는 것일 뿐이라면, 표정은 전혀 지을 필요가 없다. 표정은 표정을 바라봐줄 타자를 요구하기 때문에 감정과 함께 표정을 짓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은 나에게만 머물지 않고, 타자를 필요로 한다. ‘몸‘은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향하는 경계에 서있는 탈존이기 때문에, ‘몸’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조차 내부나 외부에 치우쳐져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린 사랑하는 사람과 얘기하면서 그 사람의 눈을 바라보고, 입꼬리의 움직임에 신중해진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서, 애인의 ‘몸‘을 느껴보려 한다

얼굴과 정체성

얼굴은 타자로 향하면서, 타자를 요청한다. 하지만 인간은 시야가 외부를 향하기 때문에, 결코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내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타자뿐이기에 인간은 타자를 요청할 수밖에 없는 탈존이다. 또한, 얼굴은 우리의 ‘몸’을 표현한다. 우리 ‘몸’의 고유한 것이지만, 정작 나는 못보고 타자만이 모든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타자는 얼굴을 통해 나를 분별해내기 때문에 타자로부터 나의 얼굴은 나를 판별할 수있다. 우리는 타자에 의해 지목 당한다. 우리에게 타고난 이름은 없지만, 타고난 얼굴은 있다. 타자는 내 이름을 몰라도 내 얼굴을 알아보기 때문에 나를 지목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내 얼굴이 팔리는 것도 모른 채 삶을 살게 된다. 누군가가 내 얼굴을 기억하고 아는 채 한다면, 우린 세계 속 타자를 마주하게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아는 누군가가 생긴다는 점. 이것은 우리가 ‘몸’을 통해 얼굴을 갖게 된다면, 타자에 의해 지목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얼굴은 이름 붙여지기 전, ‘몸‘에 주어지면서 우리에게 정체성이 된다. 스스로 정체성을 확립하기 전에, 타자에게 언명되는 사실은 우리가 주체를 형성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것은 나도 보지 못한 채 타자에게 내맡기며 나라는 사람이 특정당하는 경험을 하게 한다. 타자는 수많은 얼굴들을 판별하기 위해 이름을 붙이게 된다. 플라톤은 형상(Eidos)를 모습(morphe)라고도 표현한다. 크라튈로스에서 플라톤은 본질에 따라 이름 붙여야 된다고 주장하면서, 이름 창작자는 본질을 파악하는 자라고 한다. 본질이 주어져있다는건, 이름이 우리에게 주어져있다는 것과 같다. 플라톤의 본질은 변화하는 사물들의 본모습이며 고정되어 있는 실재이다. 하지만 사물을 바라볼때 생기는 상을 고정시키면, 그 사물은 현전하지 않고, 머릿 속에 머물러있게 된다. 우리의 얼굴을 한 모습으로 자신을 고정시킨다면, 감정에 따라 변하는 내 모든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고, 내 ‘몸’은 하나의 상에 갇힌다. 자아는 내 ‘몸‘의 감옥이다.

주체의 분열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면, 밤중에 생긴 뾰루지가 눈에 띈다. 우린 거울 볼때마다 매번 달라지는 자신의 모습에 놀란다. 이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보는거고, 이것은 타자의 관점에서 나를 바라본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의 정체성은 분열한다. 거울을 보지 않으면 결코 몰랐을 내 얼굴을 보는 순간부터, 남이 쳐다보는 내 얼굴을 신경쓰게 된다. 만약 아침에 일어나 뾰루지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외출하면서 뾰루지를 신경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내 얼굴에 뭐가 나지 않았나 뭔가 이상하지 않나, 타자의 시점에서 자신의 얼굴을 망상한다. 계속해서 자신을 검사하고 검열하는 객관적 주체는 인간이 거울을 처음 본 순간 탄생한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내가 거울로 내 얼굴을 보는 것과, 타자가 내 얼굴을 보는 것은 상당히 다르다. 내가 내 얼굴을 보고 나서는 타자가 내 얼굴을 어떻게 생각할지를 망상하지만, 내 얼굴을 전혀 모르면, 상대방에게 어떻게 보일지 모르기 때문에 표정을 검열하지 않는다. 우린 종종 표정관리하며, 자신의 감정을 숨기곤 한다. 내가 느껴지는 그대로가 상대방한테 드러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보여지는 내 모습을 조작한다. 우린 거울을 보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의 얼굴을 애써 떠올리면서 자신을 바라본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거울을 통해 내 얼굴을 바라봤을때, 얼굴이 매번 달라진다는 점에 놀란다.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 곧 자아이고, 그것을 기준으로 현재 내 모습을 판단한다. 그러므로 거울이 도구로써 놓인 곳은 항상 검열하는 장소이다. 화장실, 옷가게, 파우더룸. 모두 자신의 모습을 고치고 꾸미고 각색하는 공간이다. 이곳에 거울은 존재이유를 가지며, 우리는 그 장소에서 자신의 검열하는 사건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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