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독일 노동자당과 만나다
몇 주 전에, 자신이 관여하던 육군의 교육 과정 중 하나에서, 히틀러는 코트프리트 페더라는 이의 강의를 들었다. 이 자는 건설 기술자이자 경제학 분야의 괴짜로, "투기적인" 자본은 "창의적인" 그리고 "생산적인" 자본과는 대조적으로 독일의 경제적 문제의 많은 부분의 뿌리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페더는 투기적인 자본을 폐지시키는 정책을 지지햇고, 1917년에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었다. 이자 노예제도의 폐지를 위한 독일인의 투쟁 연맹이라는 조직이었다. 히틀러는 경제학에 대해 무지했지만, 페더의 강의에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히틀러는 페더가 "이자 노예제도의 폐지"를 위한 호소를 하는 것에서 "새로운 정당의 창설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를 보았던 것이다.
페더의 강의에서, 히틀러는 "나는 앞으로 닥칠 투쟁에서 강력한 슬로건을 깨달았다."
하지만 먼저 히틀러는 독일 노동자당 그 자체에서는 어떤 중요성도 파악하지 못했다. 히틀러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 모임에 가서,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한 스물 다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슈테르네커브로이 맥주 저장고의 어두컴컴한 방에서 모여서 재미 없는 회합을 진행하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지겨운 시간이 지나간 후 히틀러는 전혀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히틀러의 말에 따르면 그 회합은 단지 "다른 많은 단체들과도 같은 새 조직이었다. 그리고 그 회합도 마찬가지였다. 그 아느이 누구도 발전하는 것에 기뻐하지 않았고... 새 정당을 만들 때라고 느꼈다. 이런 단체들이 우후죽춘처럼 생겨나는 모든 곳에서, 결국 시간이 지난 후에 조용하게 사라지게 될 뿐이었다. 나는 독일 노동자 당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페더가 연설을 마치고, 히틀러가 막 떠나려고 하자, "교수"는 벌떡 일어나서, 페더의 주장들이 어떻게 들렸는지를 질문하더니, 바이에른은 프로이센으로부터 분리되어 오스트리아와 함께 남독일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자신의 주장을 제기했다. 사실 이 주장은 당시에 뮌헨에서 인기 있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은 히틀러를 격분하게 만들었고, 나중에 히틀러가 회상하는 바에 따르면,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배운 신사"에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이것은 명백히 매우 폭력적이었고, 그래서 히틀러에 따르면 그 "교수"는 "물에 빠진 푸들"처럼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그리고 남아 있던 청중들은 "충격을 받고 놀란 얼굴로" 그 미지의 젊은 연사를 쳐다보았다.
단 한 명의 남자가 - 히틀러가 말하기를 그 사람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 양손에 소책자를 들고 그를 따라 폴짝 뛰어 왔다.
이 남자는 생업으로 열쇠공을 하고 있던 안톤 드렉슬러였다. 국가 사회주의의 실제 창건자일 지도 모른다고 말해지는 그런 자였다. 병약하고 안경을 쓴 사내로, 공식 교육은 많이 받지 않았지만, 자유로우나 좁고 혼란스런 정신 세계를 가지고, 형편없는 작가이자 그보다 더 형편없는 연설가였던 드렉슬러는 당시 뮌헨 철도에 고용되어 있었다. 1918년 3월 7일에 드렉슬러는 자유 직능 조합들의 마르크시즘과 싸우고 독일을 위한 "정당한" 평화를 주장하기 위해서 "자유로운 노동자들의 위원회"를 창설했다. 그것은 노동자-계층 을 위한 평화 증진 협회라고 하는 북 독일에 설립된 더 큰 운동의 지부였다. (1933년 까지 독일에는 이런 허세를 부리는 이름으로 가득한 단체들이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숫자가 있었고 또 생겨나곤 했다.)
드렉슬러는 결코 마흔 명 이상의 회원을 모집하지 못했고, 1919년 1월에 자신의 위원회를 칼 하레러라는 신문 기자가 지도하는 정치적 노동자들의 모임 이라고 하는 유사한 집단과 합병했다. 새 조직은 백 명이 되지 않는 수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독일 노동자들의 당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하레르가 첫 번째 의장이었다. 히틀러는 이제 그 이름들도 잊어버린 자신의 초기 동지들 중 몇몇에 대해서는 나의 투쟁에서 거의 말하고 있지 않지만, 하레르에 대해서는 "정직하고" "확실히 넒게 교육받았다", 그러나 하레르가 "연설하는 재능"이 부족한 것이 유감이다 라고 찬사를 바쳤다. 자신의 자서전에서 분명히 한 바 대로 잠깐 동안의 명성에 대한 하레르의 주요 주장은 히틀러가 연설을 못하며, 심지어 이후에도 나치 지도자를 귀찮게 한 판단을 고집스럽게 유지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드렉슬러는 이 작고 알려지지 않은 독일 노동자들의 당에서 주요한 추진 동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