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당의 시작 1

1차 대전 후 독일의 정치 상황

by 꿈많은 미소년

친구나 자금도 없고, 직업도 가지고 있지 않고, 일을 할 기술이나 전문 자격, 또는 정규 직업에서 이전에 일했던 근무 기록 등이 없고, 무엇이 되었건 정치에서 일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 서른 살이 된 오스트리아 인이 정치 경력에서 가질 수 있는 전망이란 것은 그냥 기대해 보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처음에, 아주 잠시 만에, 히틀러도 그 사실을 인식했다.


"며칠 동안,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하더라도 결국 그 생각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냉정한 현실을 깨닫는 것에서 끝이 났다. 현실에서 나는 이름 없는 자로서 어떤 유용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초적 자원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히틀러는 1918년 11월 말에 뮌헨으로 돌아왔지만, 거기서 자신을 받아 들여준 도시의 모습을 거의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도처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고 이곳 뮌헨도 마찬가지였다. 뮌헨을 다스리던 비텔스바흐 왕도 마찬가지로 나라를 등지고 왕위를 버렸다. 바이에른은 사회 민주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놓였고, 사민주의자들은 베를린에서 태어난 인기있는 유태인 작가인 쿠르트 아이스너의 지도 아래 "인민공화국"을 설립했다. 11월 7일, 뮌헨에서 자신의 거대한 회색 턱수염과 코안경,엄청난 검은 모자와 아주 작은 체격으로 친숙한 인물인 쿠르트 아이스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의 가장 앞에 서서 거리를 터벅터벅 걸었다. 단 한 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은 채로, 의회와 정부를 점거하고 인민 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석 달 뒤에 아이스너는 한 우파 장교인 안톤 아르코 발레이 백작에 의해 암살되었다. 노동자들은 그러자 곳 소비에트 공화국을 설립했다. 그러나 이 공산주의 국가는 단명할 운명이었다. 1919년 5월 1일 베를린에서 파견된 정규군 부대들과 바이에는 "자유군단" 자원자들이 뮌헨에 입성해서 공산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소비에트에 의해 총살된 수십 명의 인질들에 대한 복수로서 몇몇 비공산주의자가 포함되어 있는 수백 명의 인물들을 학살했다. 요하네스 호프만의 지도 아래 온건한 사회 민주주의 정부가 그 시기 이후에 명목상으로 복구되었지만, 바이에른 정치에서 실제 권력은 우파에게로 이동했다.


이런 혼돈의 시기에 바이에른에서 우파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일단 정규군인 라이히스베어였다. 이들은 비텔스바흐 가 군주들이 다시 돌아와서 왕위에 앉기를 바라는 군주제 지지자들이었다. 베를린에서 설립된 민주주의 공화국을 결명한 자들은 다름이 아닌 보수주의자들의 무리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가게 되면서, 무엇보다도 동원에서 해제된 퇴역 군인들의 대규모 군중이 1918년의 세계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이들을 나타냈다. 이들은 자신들이 1914년에 떠났던 평화로운 세계로 돌아갔지만 직업을 찾을 수 없었고, 전쟁을 통해 자신들에게 깊게 배어든 거칠고 폭력적인 성향을 사회로 돌아와서도 떨쳐 버릴 수가 없던 자들이었다. 그리고 히틀러도 바로 이런 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고,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혁명 그 자체를 위해서 혁명가들이 되었고, 영구적인 상태로서 만들어진 혁명을 보길 갈망했다."

무장을 한 자유 군단 무리들이 독일 전역에서 퍼져나갔고, 라이히스베어에 의해 비밀리에 장비를 지급 받았다. 먼저 자유 군단의 대원들은 주로 본토와 단절된 동방 변경에서 폴란드인과 발트인들에 맞서 싸우는 데 동원되었다. 하지만 곧 공화 정권을 붕괴시키려는 음모를 지지하는 세력이 되었다. 1920년 3월에 그러한 세력들 가운데 한 집단이었던 악명 높은 에르하르트 여단은 약탈자에 지나지 않았던 에르하르트 대위의 인솔로 베를린을 점거했다. 그리고 그 능력이 보통 수준밖에 되지 않는 극우 정치가인 볼프강 카프 박사가 스스로 국가 재상이 되었음을 선포할 수 있게 했다. 폰 젝크트 장군이 통솔하는 정규군은 공화국 대통령과 정부가 이 혼란 속에서 서부 독일로 도망갔을 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단지 노동조합이 일으킨 총파업 만이 공화 정부를 회복시켰을 뿐이었다.


같은 시기 뮌헨에서 일어난 다른 종류의 군사 쿠데타는 더 성공적이었다. 1920년 3월 14일에 라이히스베어는 호프만의 사회주의 정부를 무너뜨리고 구스타프 폰 카르가 지도하는 우익 정권은 설립했다. 그리고 이제 바이에른의 수도는 공화국을 넘어뜨리고자 결심한 모든 세력들을 잡아 끄는 자석이 되었다. 이들은 권위주의 정권을 설치하고 베르사유 협약을 부인하고자 했다. 여기서 에르하르트 여단의 단원들을 포함하여 자유 군단의 콘도티에리는 피난처를 찾고 환영 받았다. 이곳에서 루덴도르프 장군은 불만을 가득 가지고 있던 퇴역 육군 장교들의 모임과 함께 정착했다. 여기서 정치적 암살의 음모가 논의되고 꾸며졌다. 우선 육군 장군들이 자신들이 조언하고서는 정작 책임질 부분에서 빠져나갔을 때 정전협정에 서명할 용기를 가졌던 온화한 가톨릭 전치가인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가 있었다. 그리고 뛰어나고 세련된 외무상인 발터 라테나우는 유태인이었고, 거기다 베르사유 조약의 최소한 몇몇 조항들을 국가의 정부 정책으로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극단주의자들의 증오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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