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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쑤 Oct 21. 2021

여행을 짓는 사람들 2

멸종위기의 컨시어지. 하지만 절대 사라져서는 안 되는 사람들.

눈치챈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글 어디에도 컨시어지가 여행을 '계획한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있다. 게스트로부터 의뢰받은 모든 여행을 만드는 과정은 단순히 일정의 순서를 정하는 계획의 과정과는 다르다. 게스트마다 다른 기준, 조건, 관심사, 취향을 고려한 장소, 레스토랑, 액티비티를 선별하고, 각 장소에서 게스트의 기대치를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을지 가늠해보고, 그 기대치를 채우기 위해 그 장소에서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할애하면 좋을지 계산하는 과정은 계획보다 치밀함을 요하는 설계 또는 디자인에 가깝다. 100명의 게스트를 위해 100개의 다른 여행을 설계하는 목적은 구체적이고 확고하다.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서울 여행을 선사하는 것, 그거 하나다. 두 게스트의 관심사가 아무리 '역사'로 같다 하더라도, 둘 다 경복궁을 좋아하진 않는다. 누군가는 궁궐을 좋아하는 반면에 누군가는 박물관이나 DMZ, JSA 방문을 통해 더 유의미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관심사가 역사로 같더라도 각자의 취향이란 프레임을 씌우게 되면 여러 갈래의 역사 여행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행의 갈래를 무한으로 확장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컨시어지는 언제나 서울을 배워야 한다. 이미 익숙해진 서울의 모든 것에 무뎌졌더라도 서울의 모든 소식에 항상 예민한 촉을 세우고 있어야 한다. 이게 바로 노력의 시작일 것이다. 서울 여행의 명맥을 쭉 이어가겠다는 장인의 마음으로 말이다. 장인의 마음의 반만큼이라도 절실해야 하는 이유는 컨시어지가 설계하는 여행에는 컨시어지가 이해하고 바라본 서울이 고스란히 담기기 때문이다. 내가 투영되는 여행 일정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매번 시험대에 올려진 기분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내가 새로 읽어내어 발견한 서울을 누군가의 일정에 녹여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그보다 기쁜 일은 없었다. 불안과 기쁨이 공존하는 설계의 작업은 고됐지만 즐거웠다. 그래도 해냈다는 자기만족이 더 컸기에 악착같이 서울에 매달렸던 것 같다. 서울이란 도시의 극성팬이 된 것도 이때부터가 아닐까 싶다.



 

"책에 나온 정보는 됐고, 진짜 로컬 컨시어지인 너희가 가는 곳. 진짜 너희가 추천하는 곳을 원해."

"너네 진짜 여기 가봤어? 한국인들도 여기 좋아해? 외국인들만 많은 거 아니고?"


설계를 앞둔 컨시어지가 게스트에게 가장 자주 듣는 말이다. 컨시어지는 도시에 대해서 많은 걸 알아야 하는 것과 동시에 도시에서의 경험을 직접 많이 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매번 새로운 여행을 설계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는 컨시어지에게 서울의 기존 여행정보는 뻔하고 제한적이고 반복적이다. 또한 무엇이든지 K를 앞에 붙여 파생된 관광상품들은 서울을 알리기에 충분치도, 적합하지도 않다. 서울을 세상에 널리 알려 이롭게 하려는 컨시어지에겐 플러스알파의 서울이 간절하다. 그러기 위해서 컨시어지는 너무 유행을 좇을 필요도 없고 너무 새로운 것만 찾을 필요도 없다. 그저 서울에 대한 애정을 가득 담은 네이티브의 눈으로 도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즐기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서울 여행의 소재가 될만한 것들을 손에 잔뜩 쥐고 있을 것이다.


그동안 서울을 찾은 주요 관광객의 방문 목적을 살펴보면 쇼핑, 뷰티가 주를 이뤘고, 짧은 일정으로 자주 온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어쩌다 중국, 일본, 대만, 동남아 관광객들에게 과하게 초점이 맞춰진 도시가 되어버린 서울은 진짜 서울의 본때를 보여줄 틈도 없이 쇼핑과 뷰티의 왕국이 되어버렸다. 분명 이것은 서울도 원치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 예술, 역사, 건축, 카페, 디자인, 문학, 음식, IT 등 가늠할 수 없는 폭넓은 관심사를 가진 게스트의 여러 여행을 설계하기엔 이미 알려진 여행 정보로는 택도 없었다. 그 이상을 준비하기 위해 서울을 더 자세히 들여다본 결과, 서울은 생각보다 놀라운 도시이자 할 거리와 들려줄 이야기가 많은 도시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코 재미없는 도시가 아니다. 장담컨대 이보다 활기차고 다이내믹한 도시는 지구 상에 또 없을 것이다. 


게스트는 컨시어지가 설계한 여행을 바탕으로 서울을 통해 그들은 서울을 보고, 느끼고, 먹고, 즐기고, 이해한다. 다시 말해, 컨시어지는 게스트가 평생 안고 갈 기억의 아주 작은 일부를 책임지게 되는 것이다. 모두에게 여행 다녀온 기억은 마음속 어딘가에 각인된다는 특징이 있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게 여행인데 이왕이면 서울이 좋은 도시로 기억되었으면 좋지 않겠는가! 하지만 국내에서 컨시어지가 언제부터, 어쩌다 그 고유의 의미를 잃었는지 모르겠다. 몇몇 사람들은 호텔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사람들이 컨시어지라 하지만, 단순히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었다는 의미를 넘어 게스트와 관계라는 것을 형성할 수 있는 원 앤 온리 포지션이 바로 컨시어지다. 게스트 서비스에 중점을 둔 호텔에서 자발적으로 컨시어지를 포기한다는 것은 브랜드와 서비스 자체를 져버리겠다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국내 호텔 업계에도 럭셔리라는 콘셉트가 자리잡기 시작했고 관련 브랜드가 두어 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컨시어지는 왜 아직까지도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걸까? 웬만한 럭셔리 호텔의 시스템은 전부 도입하거나 벤치마킹하면서 어째서 럭셔리 호텔의 척도가 되는 컨시어지는 쏙 빼먹은 걸까? 국내에 들어온 해외 럭셔리 브랜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명목 상 컨시어지라는 이름은 쓰지만, 실제로는 다른 프런트 부서와 통합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럭셔리 호텔의 핵심인 컨시어지의 위치를 바로 세우지 못한 건 호텔과 게스트 모두에게 참 아쉬운 일이다. 호텔도 호텔이지만, 서울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컨시어지인데 해외 여행객이 코로나로 인해 많이 줄었다는 이유 하나로 팀 자체를 없애거나 인원을 줄이고 있는 요즘. 관계자 여러분, 정말 그럼 못 써요. 떽.




컨시어지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 여행자의 여행은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지금은 여행조차 마음 대로 떠날 수 없지만, 언젠가 다가올 여행은 꼭 컨시어지와 함께 하는 여행을 기대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각자 품고 있는 마음의 고향이자 아끼는 도시에서의 유일한 자신만의 경험이 가득한 그런 여행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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