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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쑤 Oct 21. 2021

여행을 짓는 사람들 1

단 한 사람을 위해, 단 하나의 서울 여행을 지어드립니다.

잠시 컨시어지가 되어 게스트 A의 이메일 요약본을 바탕으로 여행을 설계해보자.

어린 두 자녀와 함께 여행하는 미국인 가족이다. 첫째는 4세, 막내는 1세. 서울은 처음이라 서울의 문화와 역사가 가장 궁금하고 음식은 가리는 거 없이 다 잘 먹으며 좋은 음식이 있는 곳이라면 식사하는 분위기는 크게 상관없다고 한다. 마침 이 여행은 부부의 결혼기념일을 위해 계획된 여행이라고 한다. 단 둘을 위한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에서의 디너 예약을 반드시 해달라고 한다.

*주의: 게스트의 최종 컨펌까지 멀고도 험난한 길이 예상되니 인내심과 평정심을 잃지 말 것!

먼저 오전 10시에 하는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에 맞춰 일정을 시작해볼까? 보통 1시간이면 경복궁을 둘러보긴 하는데.. 4살 된 첫째에 막내까지 있다고 하니 1시간 더 걸리겠지? 유모차를 끌고 다녀야 하니까. 경복궁을 다 둘러보는 건 무리일 테니 핵심 건물을 따라 산책하듯 걸어다닐 수 있게 지도를 따로 준비해야겠다. 아, 혹시 첫째가 딸이면 한복을 입어보고 싶어 하려나? 이것도 확인해보면 되고.. 얼추 다 보고 나오면 점심시간인데, 직장인들이 붐빌 시간이니 예약 가능한 궁궐 근처의 식당들 리스트업 하면 되고. 아, 근데 경복궁은 매주 화요일에 닫으니 화요일은 안 되겠고.. 그럼 수요일에 이 일정을 넣어야겠다. 넷이 일정을 소화하기에는 벅찰 수도 있으니까 본격 투어 일정을 도와줄 가이드가 필요한지도 물어봐야겠다. (중략)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 A와 B 중에서 어디가 좋을까? 개인적으로 A가 좋긴 한데.. 여기를 추천하는 이유와 함께 예약 가능한 날짜와 시간을 보내주면 되겠다. 그나저나 단 둘을 위한 거면 둘만 가는 거겠네? 그러면 아이들은? 아무래도 베이비시터가 필요할 것 같으니 먼저 물어봐야겠다. 혹시 모르니까 베이비시터 서비스 견적도 업체에 미리 받아두면 좋을 것 같아. 근데 이 날 설마 비가 오진 않겠지.. 혹시 모르니 플랜 B도 필요하겠네..? 아니 그보다 나 퇴근 언제 하냐고요..


언뜻 요란해 보이는 이 사고의 흐름은 주어진 최소한의 정보를 바탕으로 게스트 여행의 뼈대를 잡는 기초 작업으로 본격적인 여행 설계에 앞서 가장 중요한 첫 단계이다. 개인의 취향을 오롯이 담은 여행의 뼈대를 견고히 잡아놓아야 이후의 일이 편해진다. 뼈대에 어울리는 장소, 레스토랑 등을 시간순으로 촘촘하게 엮어가며 살을 붙이는 과정을 통해 맥락 있는 맞춤형 여행을 완성해내는 과정은 마치 집터를 정하여 다지고 바닥부터 지붕까지 차근차근 단계별로 집을 짓는 과정과 닮았다. 단숨에 뚝딱 지어지는 집이 없듯이 컨시어지가 만들어내는 여행 또한 시간이 꽤 걸린다. 집을 짓고, 밥을 짓고, 글을 짓듯이 어쩌면 컨시어지를 여행을 짓는 사람들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냥 여행책자나 인터넷에 나오는 정보를 모아서 주면 되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같은 호텔에서 일하는 직원도 하는 일이 별것도 아니면서 유난 떤다고 비꼬았었다. 어차피 사람 하는 여행이 다 비슷비슷할 텐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대체 컨시어지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요즘은 누구나 여행을 쉽게 준비하고 계획할 수 있다. 검색 한번이면 쏟아지는 정보들 중 입맛에 맞는 곳을 골라 지도에 핀해두면 그만이다. 이렇게 편한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컨시어지에게 여행을 의뢰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이들에겐 충분하다 못해 범람하고 있는 획일적인 여행 정보가 아닌 도시에 대한 팁, 의견, 생각이 필요한 것이다. 넘치는 정보 중에서 진짜를 골라내어 네이티브의 인사이더 팁을 얹어줄 수 있는 컨시어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컨시어지와 함께 하는 여행 준비가 익숙한 사람들은 무조건 어디를 많이 가고 맛있는 걸 많이 먹고 보는 여행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들은 도시 자체를 음미하고 향유할 수 있는 진짜 경험에 무게를 둔 질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여행을 기대한다. 게스트가 이토록 바라는 수준 높은 여행의 구현 여부는 곧 호텔의 빛나는 별의 개수에 걸맞는 서비스 수준과 게스트의 만족도와 직결되는 일이다. '이렇게까지' 하는 컨시어지가 호텔에 존재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개인적이고도 유난스러운 이유를 하나 덧붙이자면 이왕 서울까지 온 외국인 게스트인데 그들에게는 꼭 제대로 된 서울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특히 서울이 처음인 게스트들이 많았기에 그들이 좋은 곳만 가고, 좋은 것만 먹고, 좋은 것만 느끼고, 좋은 경험만 했으면 마음이었다. 다 퍼주고 더 주고 싶은 코리안의 정이 이런 걸까? 그런 깊은 정으로 빚어낸 여행을 마친 게스트가 집으로 돌아가 서울이 꽤 멋지고 괜찮은 도시였다며 오래도록 추억할 수만 있다면 컨시어지는 그걸로 된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게스트가 서울 여행을 다시 결정하게 된다면 컨시어지는 그 이상의 몫을 해낸 것이다.


로컬의 눈으로 본, 오직 '나를 위한' 도시의 경험을 원하는 게스트. 그리고 오직 '그들을 위한' 단순한 일정의 나열이 아닌 맥락 있는 여행의 설계이자 경험을 설계하는 컨시어지. 이 글을 읽는 모두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컨시어지가 제법 근사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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