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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쑤 Oct 06. 2021

(INTJ형) 컨시어지

저는 변수가 싫은 인티제인데 말이죠.

계획이 틀어지는 걸 싫어하는 INTJ형 인간인 나는 변수를 싫어한다. 세심하게 설계된 스케줄에 방해가 되는 즉흥적이고 돌발적인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고 한다. 갑자기 잡히는 약속도 싫어한다. 이런 내가 그 수많은 변수의 밭에 던져진 거나 다름없는 컨시어지였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예측조차 할 수 없는 게스트들의 변수 속에서 어떻게 일을 할 수 있었나 싶다.


로비의 소음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점심을 먹던 도중에 남의 상견례 자리에 통역사로 차출된 적이 있었다. 호텔에 투숙 중인 결혼을 앞둔 커플이었고 여자는 한국인, 남자는 미국인이었다. 신랑 될 사람을 한국에 사는 가족들에게 소개하는 중요한 자리였고 통역을 요청한 건 여자 쪽이었다. 한국어와 영어가 유일하게 가능했던 본인이 신랑과 식구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워낙 식구들이 많은 탓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내 상견례도 태어나서 해본 적이 없는데, 남의 상견례라니!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예행연습이라 치고 나의 게스트가 나를 필요로 하니 무조건 YES! 결국 점심시간 강제 종료. 보통 상견례라고 하면 7-8명 정도 함께 하는데, 이 날은 말이 상견례지 거대한 가족 모임이나 다름없었다. 어림잡아 20명? 무엇보다 교수, 의사, 애널리스트, 과학자 등 식구들의 전문적인 분야부터 소소한 일상 이야기까지 통역의 범위도 스펙터클 해서 영혼이 탈곡된 기억이 있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이런 날도 있었다. 평화로운 퇴근길을 앞두고 있는데 갑자기 내일 모 IT 회사의 임원이 체크인한다더라. 그는 총지배인까지 케어하는 호텔 VIP였다. 벌써부터 부담스러운 게스트가 아닐 수 없다. IT 업계 종사자답게 그는 우리나라 통신의 역사를 알고 싶다고 총지배인에게 말했고 이는 나에게 곧장 전달되었다. 하필 내일 오전 10시부터 투어를 시작하는 걸로 정해준 탓에 지체 없이 부지런히 준비해야 했다. 집에 가서 발 뻗고 맥주 마시고 치킨이나 뜯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려는 내 계획에 아주 심각한 변수가 생긴 거다. IT 강국 코리아지만 통신이라는 생소한 주제를 투어로 어떻게 풀어낼지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광화문 KT 본사 1층에 KT 스퀘어와 그 한편에 ‘Gallery KT’라는 통신의 역사를 다룬 전시관이 있었고 이외에도 SK에서 티움 (T.UM)이라는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마음 둘 곳이 있었던 덕분에 그날 밤 오직 단 한 명의 VIP를 위해 진행됐던 5시간짜리 투어는 대성공이었다. 방금 위에서 언급했던 두 장소는 우리나라의 IT를 비롯한 기술을 체험하고 관람할 수 있는 공간으로 어린이를 동반한 외국인 가족들에게도 자주 추천한 장소였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게스트는 수원에 위치한 삼성 이노베이션 뮤지엄도 기꺼이 방문하곤 했었다. 의외로 우리의 기술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게스트들이 많았다는 것이 늘 신기했다.


통역과 투어는 무사히 잘 끝났고 다시는 이런 변수가 생기지 않길 바랐지만, 회사 일은 참 뜻대로 안 된다. 이후 여러 차례 통역사 부캐를 장착해야 할 일이 있었고 이외에도 많은 부캐를 컨시어지인 덕분에 가질 수 있었다. 재주 많은 부캐들이 생긴 건 좋지만, 뭐가 됐든 변수가 여전히 제일 싫은 INTJ형 컨시어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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