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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쑤 Oct 21. 2021

(시간을 달리는) 컨시어지

여러분, 허투루 쓸 1분, 1초가 컨시어지에겐 없어요.

일반적으로 호텔 데스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쉬운 일을 하고 있을 거라는 편견이 있다. 그나마 체크인, 체크아웃을 하는 프런트 데스크 직원들은 조금 나은 편이다. 늘 프런트 데스크 옆에 자리한 컨시어지는 그저 가만히 서있으면서 길이나 층수를 알려주는 아르바이트생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다. 딱 거기까지면 좋을 텐데 어떤 게스트는 자녀의 학업을 장려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대수롭지 않게 이런 이야기를 앞에서 한다. "너도 공부 못하면 나중에 커서 이 언니들처럼 여기서 일하게 돼." 어떤 게스트는 컴플레인을 하면서 호텔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런 말도 내뱉는다. "네가 공부도 못하니까 이런 데서 일이나 하고 있는 거야." 이런 말을 매일 듣진 않는다. 손에 꼽을 정도로 어쩌다 듣는 말이지만 한 번이라도 듣게 되는 날에는 굉장한 데미지를 입게 된다. 다행인 건 이런 말들도 듣다 보면 내성이 생겨 웬만한 말을 들어도 타격감이 없는 타의에 의한 멘탈 훈련이 가능하지만, 결국 저 두 게스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하나다. 죄송하지만 요즘 공부 못하면 '이런데'서도 일을 못한다는 것이다.


컨시어지도 여느 직장인과 다를 게 없다. 출근하면 벌써 퇴근하고 싶고 받은 월급의 반만 일하고 싶다. 그렇다고 탱자탱자 노는 컨시어지는 없다. 문제는 게스트 시점으로 데스크를 바라보면 직원들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시선을 45도 정도 아래에 두고 어딘가를 응시하는 것 같긴 한데 딱히 바빠 보이지 않는다. 키보드를 부실 듯이 두들기며 일하고 있는데, 어떠한 티가 요만큼도 안 난다는 건 데스크 뒤에 섰던 사람으로서 굉장히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억울함은 꼭 해명하고 컨시어지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세상에 반드시 알려야 한다!


24시간으로 운영되는 컨시어지 팀도 많지만, 우리 팀은 오전 7시부터 저녁 11시까지 운영되었고 하루에 4~5명이 3교대로 근무하며 하루를 책임졌다. 출근하여 가장 먼저 할 일은 간밤에 게스트는 강녕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오늘 하루의 운세를 점치는데 이는 매일 치르는 컨시어지만의 신성한 리추얼이다. 누구보다 절실한 마음으로 부디 평안한 하루를 허락해달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린 운세의 결과는 인박스에 들어있는 이메일의 개수다. 쌓여있는 이메일의 개수는 오늘 하루의 피로도를 미리 알아볼 수 있는 컨시어지만의 중요한 지표로 주말을 제외하면 평균적으로 20~30통 정도 쌓여있다. 이 정도는 양반이다. 많을 때는 50통 가까이 쌓여있을 때도 있다. 이메일의 반 정도가 스팸 메일이면 참 좋을 텐데,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할 리가 없다. 암요 그렇고 말고요.




내부적으로 이메일에 답장한다는 말 대신 쳐낸다는 은어를 썼다. 이미 쳐낸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내 앞으로 쌓인 이메일을 해치워버리겠다는 전투력이 강하게 느껴진다. 전투력은 게스트가 보내온 이메일의 난이도에 따라 정도가 달라진다. 짧으면 3분 내외에 쳐내는 이메일도 있지만, 반나절 정도 (때론 그 이상) 걸리는 이메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전투력은 꽤 오래 지속될 것이다. 


이메일 더미 속에서 이메일을 한창 쳐내고 있다 보면 로비 저편에서 게스트가 다가온다. 그리고 그 게스트 뒤로 또 다른 게스트가 줄을 서기 시작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 전화까지 울려대고 새 이메일은 인박스에 눈 내리 듯 계속 쌓이고 있는 이 혼돈을 맞이하게 되는 특이점이 온다. 이메일을 쳐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게스트 대면하는 시간도 게스트의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깔끔하게 질문 하나 던지고 가는 사람이면 좋으련만. 우리 게스트는 어찌나 호기심도 많고 수다스러운지. 뒤에 선 대기줄은 개의치 않고 1시간 가까이 컨시어지와 즉석에서 여행을 설계하기도 한다. 설계의 굴레에서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다. 미쳐버린 이 혼돈의 질서를 잡아줄 사람은 데스크에 선 컨시어지는 겨우 한 두 명인데, 감당해야 할 게스트의 수는 쉽게 줄지 않는다. 굉장히 부담스럽고 초조한 일이지만, 데스크 앞에 유니폼을 입고 선 이상, 늘 있는 일인 듯 자연스럽게 게스트의 동시다발적인 요청을 능수능란하게 저글링 해야 한다. 해내야만 한다.


매일 업데이트되는 소소하고 작은 정보들도 미리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를 테면 요즘 인기 있는 뷰티 브랜드, 화제가 되고 있는 연예인, 현재 상영하고 있는 영화, 아이폰 국내 출시일, 방탄소년단 콘서트 일자, 오늘의 교통 상황 등이다. 어떤 타이밍에 게스트가 어떤 질문을 할지 모르기에 수집광이 되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이 혼돈에 정신이 완전히 빨려 들어갈 때쯤이면 중간조와 오후조 컨시어지가 순차적으로 서비스의 맥이 끊기지 않게 자연스레 합류하며 바통 터치를 한다. 이제 한숨 돌리면서 점심 먹을 시간이 생겼지만, 때론 밥 먹을 시간까지 고스란히 반납하며 밀린 이메일을 처리하기도 한다. 밥보다 이른 퇴근을 선택했달까. 


아무리 게스트 관련 업무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하여, 각자의 역량을 키우기 위한 업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조금 특별했던 우리 팀은 한 달 중 하루는 꼭 서울 탐방의 날로 지정하여 팀을 나누어 외근을 했었다. 호텔리어가 데스크를 비우고 외근을 한다는 건 굉장히 획기적인 일이다. 호텔리어는 살아도 데스크에서 살고 죽어도 데스크에서 죽어야 한다는 이 고정관념에 갇힌 사람들의 시선을 이겨내랴, 일하랴 참 고생했다. 남의 여행을 설계하는 사람에겐 무엇이든 직접 경험해보는 것만큼 좋은 건 없기에 팀이 최대한 많은 경험에 노출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고자 했다. 탐방이 끝난 후, 게스트에게 배포할 여행 정보 초안과 보고서 작성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외에도 월말 정산, 차량 어레인지, 타 부서와의 협업 등 몸이 열개라도 모자란 사람들의 열정과 패기 하나로 꾸려 나가는 팀인데, 그저 쉬운 일을 하는 쉬운 사람이라 단정 짓는 건 그 무엇보다 서운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자리를 빌어 꼭 말하고 싶은 게 있다. 함께 고생했던 우리 팀. 여러분은 위대하고 대단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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