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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그조띠끄 김서윤 Oct 04. 2023

설치미술 같은 예술가의 아뜰리에를 이 집에 구현한다면

절박하게 탐욕을 부렸던 내 꿈의 잔영들을 조각조각 다시 기웠다



"낭만과 관능 사이, 

혹은 이 세상이 아닌 그 어딘가 비일상적인 곳"



19세기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브 모로의 집이자 작업실을 내내 환영처럼 간직했습니다.


그렇게 미학적이고 또 지적일 수 있다면..,










밤에 잠시 세찬 비가 내렸다. 나의 집은 괜찮은 걸까?

이 과정도 하나의 값진 경험으로 귀결될 수 있을까... 정말로? 시공해 줄 업체를 드디어, 다시 만났다는 안도감도 잠시 아직은 긴장감에 내 몸의 온갖 것들이 날을 세우고 독기를 품은 채 현 상황을 노려보고 있는 듯하다. 매일 얕은 잠에서 깨어 의식을 회복하며 가장 먼저 드는 놀라운 깨달음. '아,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나는 여전히 지하 원룸에 살고 있구나.' 


유난히 긴 이 꿈에 오늘은 시니컬한 비관도 덧댄다. 참 한심하군. 고작 이렇게 밖에 일을 끌고 오지 못하다니. 돌아보니 지난 시간 곳곳 한심한 일들만 진탕이어서 내 그런 창피한 선택들이 너무 많아서 결국엔 모두가 내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을 것만 같았다. 한껏 면피를 해보더라도 겨우 안 좋은 운탓밖에는 없다. (불운보다는 차라리 내 모자람이 낫지 않을까. 운 없는 사람은 앞으로도 절망뿐일 테니.) 스스로도 이렇게 창피한데 누군가 이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기껏 공간디렉터라는 사람이 너무 어리숙하잖아! 안된다. 더 이상 자존심이 무너지면 곤란하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재산과 재능을 바쳐 하나의 근사한 포트폴리오로 삼고자 했던 이 생존 작업에 자존심을 잃는 것은 성장은커녕 소생마저 불가한 위축뿐이다.


실력에 대한 의구심만은 안된다. 물론 좀 더 지혜로웠어야 한다거나, 현명했어야 했다거나, 나이브하지 않게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봤어야 했다는 다소 모자란 내 행동에 대한 지적과 비난이라면 수용해야 마땅하지만.



절박하게 탐욕을 부렸던 내 꿈의 잔영들을 조각조각 다시 기워야만 한다.





폐허. 

50여 년에 달하는 긴 세월 동안 눈, 비, 바람, 햇빛 등 거스를 길 없는 자연의 스침이 지어낸 남루한 흔적 그리고 인간의 손에 부서지고 내팽개쳐진 인공적인 잔해의 물질들이 적막하게 어우러져 아무도 찾지 않는 매쾌한 유적 같아진 텅 빈 공간 (내 빈약한 낙천적 낭만을 덧댄 주관적 해석). 어쩌면 그저 폐가처럼 방치되어 어느새 동네 흉물이 되어 버린 곳 (냉정한 타자의 시각으로 본 객관적 해석). 모순된 해석들... 이 곤란한 폐허 같은 곳이 현재 나의 집이다.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 Musée National Gustave Moreau 
프랑스 파리, 14 Rue de la Rochefoucauld, 75009 Paris, France



마치 예술가의 아뜰리에처럼.

Maison et atelier du peintre


미학적 패러다임과 지적인 관념을 관능적이고 신비롭게 화폭에 담아낸 19세기 프랑스 낭만적 상징주의 화가 귀스타브 모로의 집이자 작업실이었던 곳, 지금은 약 1,200점의 유화 및 수채화와 거의 1만 3,000점에 달하는 데생으로 가득한 국립 미술관이 된 곳, 생전 그림을 그렸던 3층의 화실과 침실이나 화구 등 모로의 개인적인 흔적이 온전히 보존된 채 공간 자체가 예술이 된 곳, 파리의 그곳을 환영처럼 내내 떠올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의 삶과 기억으로 빼곡히 채운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이다. 당대 모로의 집에서는 유명한 예술가들이 모여 밤새 토론을 하고 홈파티를 열었다.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그가 수집한 가구와 진귀한 이국의 물품들이 가득했다. 이 모든 게 내가 꿈꾸고 있는 '나의 집'에 대한 개념이고 생생한 레퍼런스였다.


내게 집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예술가의 아뜰리에 같은 곳이니까.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Oedipus and the Sphinx>, 귀스타브 모로 Gustave Moreau, 1864년, 캔버스에 유채, 206 X 105cm,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Metropolitan Museum of Art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신화적 주제를 공고히 한 모로는 1864년 이 작품으로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오이디푸스에게 매달린 스핑크스는 그를 해치려는 것 같기도, 유혹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며 무표정의 오이디푸스 또한 그녀에게 매혹된 것 같기도, 혐오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림의 섬세한 윤곽선과 단단한 구조 속에 뭔가 불길하고 기이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정신과 물질, 죽음과 탄생 같은 인간의 삶에서의 양극단적인 문제들을 탐구하고자 애썼던 이 화가의 가장 큰 중요성은 작품에서 보이는 지성적인 내용이다.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속에 그런 모로의 지성적이고 미학적인 이상이 잘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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