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당신의 실력과 조언을 나를 나의 직관과 감각을 믿고 그렇게 갑니다
밤에 잠시 세찬 비가 내렸다. 공사를 다시 시작하려면 아직 2주는 더 기다려야 한다. 종종 희망으로 부풀다가도 통장 잔고와 밤새 길냥이들이 할퀴고 간 폐가 같은 이 집을 마주하면 여지없이 심란해졌다. 업체는 다른 프로젝트로 언제나 바빴다. 이렇게나 바빠하는데 그냥 가도 괜찮은 걸까. 계약을 한 상태도 아니고 구두로 약속한 공사 시작 시점까지 시간이 얼어붙은 듯 더디게 흐르고 있었다. 혹시 설마 또 엎어지는 건 아니겠지... 몇 달간 타의적으로 쓸데없이 잘 학습된 걱정이 뿌리 깊게 자리를 잡았나 보다. 별 걱정을 다하네... 그렇지? 그런 거지?
6월의 도입부, 봄날 내내 흩뿌려지던 총천연 빛깔의 달큰한 꽃향기가 초록의 싱그러운 풀향으로 치환된 채, 초여름 밤공기에 묻은 산자락 냄새가 벌써부터 내 몸 가득 여름을 안긴다. 이러고 시간만 죽이고 있을 일은 아니지. 디자인 시안과 도면을 (미리부터 예산을 우려하며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업체에게 건네고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제주도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그 기간 동안 공사 견적서가 작성될 거였다.
무려 4박 5일. 엄마의 칠순과 아빠의 성공적인 폐암 수술을 기념하며 10명의 온 식구가 대단한 결심 즉 효심과 끈끈한 가족애를 보여주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장착한 채 허둥지둥 국내선 비행기에 올랐다. 2살 꼬맹이의 막무가내 울음부터 어떤 장문의 질문에도 짧은 답변뿐인 초등학생 중학생 조카들의 쿨내, 분주히 우리 단체 관광객의 캐리어를 부치고 발권을 하며 흡사 여행가이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남동생과 제부의 벌써부터 피곤한 표정, 빨리 안 움직인다고 잔소리를 쉬지 않는 70대 꼰대 아빠의 다시금 건강해진 웅얼거림..., 그리고 오랜만에 한자리에 만난 네 여자의 두서없는 반가운 수다와 결코 멈출 리 없는 셀카.
거의 15년 만에 다시 찾은 제주도는 그때엔 볼 수 없었던 세계적인 건축가가 지은 고품격의 미술관과 여전히 오묘한 남국의 바다빛 그리고 화산이 연출해 낸 기묘한 자연물들로 호사스런 장광을 내뿜었다. 바다 앞 펜션의 야외 테라스에서 새벽 여운이 남겨놓은 푸른 아침빛과 짭조름한 태양의 진홍빛 잔향에 반짝이는 야자수잎사귀를 바라보며 이 비현실적인 순간을 한 달만 더 부여잡고 싶은 마음도 일었다. 아니 일 년도 가능한 거 아닌가? 서울만 고집하며 낯선 변두리의 50년 된 집을 굳이 고쳐 산다는 게 부질없는 헛소동같이 느껴졌다. 서울에서의 지난 몇 달이 오히려 꿈인듯했다. 서울은 상투적인 허상 같았다.
그렇게 신명만 날 것 같은 4박 5일이었지만 현실은, 2세부터 70대까지 인간 나이의 거의 모든 스펙트럼을 지닌 우리 10명의 가족들에게 차츰차츰 인내심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그 나잇대에 맞게, 각자의 성향에 맞게, 맙소사! 세상 제각각이었다. 싫어하는 이유는 좋아하는 이유보다 언제나 강력하다. 바이크로 신나게 우도를 달리고 맛집을 탐험하며 흐드러지는 수국에 파묻혀 행복해하는 소녀 같은 엄마와 힙한 바에서 알싸한 취기까지 장착했지만, 마지막밤 요트 투어에서는 다들 다크서클로 드러난 피로감이 장난이 아니더라고. 그래 4박 5일은 조금 너무했지. 우리 모두 애쓰고 또 그만큼 행복했어. 한참을 지나 보니 그리울 장면만이 남았다.
나의 집은 괜찮은 걸까?
서울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비행시간보다 훨씬 더 오래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아차산 자락 나의 집부터 찾는다. 어둑한 그늘진 하늘아래 부슬부슬 내리는 비로 한층 더 음산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견적서가 와 있으려나. 빗소리를 파고드는 저 끼익대는 새소리는 까마귀일까 까치일까. 길조일까 흉조일까. 견적서를 열어보는 일은 언제나 떨렸다. 아직까지 증오할 수밖에 없는 이전 업체의 황당한 예산의 충격이 여지없이 떠오르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콩닥콩닥 두근두근....... (마음을 단단히 먹고 경우의 수를 몇 개 산정해 보고 두 눈 질끈 감은 채) 클릭! 이게 이럴일이야? 그렇다. 이럴일이다. 일단 시선을 빠르게 돌려 최종 숫자먼저 확인한다. 견적은 다행히 합리적이었고 아니 솔직히 말하면 다른 곳보다 저렴한 편이었다. 휴..... 살았다. 정말 떨었었거든.
자 이제 예산을 줄이기 위해 무얼 어떻게 해야 하나?
"이 현장에 상주하고 있을 이기사입니다. 제가 여기에 내내 붙어 있을 수는 없어도 아침마다 들러 체크하고 다 컨트롤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뽀글뽀글 펌한 머리에 귀여운 베이비 페이스를 가진 (이 정도면 진짜 베이비잖아!) 20대 초중반쯤으로 보이는 소년 아니 청년이 멋쩍게 인사를 한다. 샤이한 편인가? 대표님처럼 무뚝뚝한 편인가? 우리 시공사 대표님은 꽤 무뚝뚝한 성격이다. 당연히 조금은 네고해주겠지 싶었고 그게 아니라면 십만단위 절사쯤은 관례상 기분 좋게 해주는 게 상도이지 싶었던 나의 뻔한 기대를 이거야말로 당연하다는 듯 져버리셨다. 1원도 네고안해주신 완강한 우리 시공사 대표님은 적대도 없고 과잉의 친절도 없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신뢰가 가는지도 모르겠다. 단정히 선을 지키고 서로의 입장을 망각하지 않고 그렇게 예의 있는 프랜들리함으로 가보는 거다.
그래 나도 이 말 한번 해보자.
"대표님만 믿고 갑니다.
당신을, 당신의 실력을, 당신의 조언을 믿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