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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그조띠끄 김서윤 Oct 17. 2023

이 집에서의 첫겨울, 라흐마니노프가 흐른다

이렇게 평온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주어진 대로 즐기자.



'높은 박공천장 아래로

공사 소음 대신 라흐마니노프가 흐른다

공사 분진 대신 샌달우드 향내가 퍼진다'



공사를 잠시 중단하고 겨울의 창백한 대기 속으로 침잠했다.










지난 토요일 낙엽은 온 감각으로, 한 계절의 소멸을 우수에 찬 낭만적 장면으로 나뒹굴었다. 그리고 오늘, 오늘은 유독 겨울냄새가 난다. 올 들어 가장 묵직하게 계절이 바뀌는 냄새가 곳곳에서 감지되는 첫날이다. 


잔뜩 찌푸린 11월 말의 대기에는 우수수 떨어지는 늦가을의 허무조차 담지 못한 애절한 기류가 흘러 다녔다. 단지 어제까지는 늦가을이었고 오늘부터 초겨울이야 이렇게 선을 그을 수 있는 근거는 없지만, 내 몸이 내 마음이 "오늘부터는 겨울이야"라고 선언하고 있었다. 훌쩍훌쩍 스으읍~…, 언제 첫 진단을 받은 건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만성비염도 여지없다. 기온에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소름 끼치게 갑자기 추워졌다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정말이지 이건 심상에 관련된 거라고 밖에는 덧붙일 말이 없다. 




돌이켜보면, 내 아련하고 아득하고 노스택직한 기억들에는 대부분 여름보다는 겨울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조금은 더 설레고 싶고 그 말캉말캉해진 감성 때문인지 진짜! 당장이라도! 로맨틱한 사건이 벌어질 것만 같아 두 볼마저 발그레 달뜨게 된 건... 그 온갖 추억들 때문일까? 내내 듣던 가을 재즈대신 별 고민 없이 클래식 한 곡을 튼다. 웬일로?... 이렇게 내게는 오늘부터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작년 겨울도, 재작년 겨울도, 아마도 십 년 전의 겨울도 똑같이 시작되었었다는 것을 (심지어 모든 계절이 그랬다는 것을) 망각한 채 이처럼 경이로운 겨울의 시작은 처음이라는 듯 어린아이처럼 감탄하며 내 새로운 집에서의 첫겨울을 맞는다. 



여름을 가장 애정하지만 '겨울'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쌓이는 눈, 아련한 밤 그리고 어느새 지나간 1년이라는 흔적과의 마지막 대화. 



이 집에서의 첫겨울, 높은 박공 천장 아래로 공사 소음 대신 라흐마니노프 선율이 흐른다. 공사 분진 대신 샌달우드 향내가 퍼진다. 겨울에 듣는 라흐마니노프. 이 서늘함, 이 적막함, 겨울 대기의 느슨한 연대, 철저한 개인주의, 그 규칙적인 공백 사이사이를 동토의 라흐마니노프가 부유하고 있다. 클래식 음악이 이렇게 고상하게 아름다웠던가. 저 시리도록 애잔한 음률 속에서 시베리아의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와 소리 너무 좋다. 스피커 뭐예요?"


이 물음엔 언제나 몹시 흡족해했다. 뾰로통한 기분에서도 이 질문만 들으면 내 광대가 저절로 승천하며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저 복층에 설치한 TV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일 뿐인데 높은 천장고 덕에 사운드가 증폭되며 아주 근사한 소리의 질감이 만들어졌다. 공짜로 명품을 얻은 기분이랄까. 가끔 찌르르하고 벽에 반사된 오보에 선율은 그 나즈막한 저음의 떨림으로 내 촉감마저 예민하게 자극했다. 정적을 더 좋아하던 내가 음악을 향유하게 되었고 더 좋은 곡을 찾아 내 귀의 무딘 감각을 부지런히 연마시키기 시작했다. 음악이 흐르지 않을 때면 마치 향취 없는 무생물이 된 것처럼 나도 이 공간도 차갑게 식어갔다.   



아니 무섭다기보다는 또!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터졌다는 게 고단하게 느껴져서다. 리모델링 기간 내내, 겨우 해결하고 돌아서면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이 번호표라도 뽑은 듯 당당하게 나를 기절시켰다. 그 고역을 당분간만이라도 좋으니 제발 피하고픈 마음. 이젠 알겠지?

"에구 얼마나 힘들었으면"....??? 나조차도 설득될뻔한 충분한 자기변명 아니 자기 합리화이긴 하네. 하지만 그만! 그게 진심이라 해도 제발 이제 그만! 엄살은 그만둬. 그 변함없는 엄살 나조차도 듣기 싫으니까. 이번만은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내 입으로 내 자신에게 가장 명료한 직설화법으로 들려주고 싶다. "다들 그렇게 살아." (..... 삶은 원래 그런 거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겨우 거머쥔 이런 평화로운 시절에도 슬그머니 불안을 불러들이다니. 평생 행복에 익숙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어리석게. 


자! 그럼에도 이렇게 평온해도 되는 걸까 싶은 의심이 떠나지 않는다면, 그 실체 없는 불행의 소리가 내 귀에 닿지 않게 음악을 울리면 된다. 침묵마저 스며들 틈이 없도록 끊임없이 소리를 흘리면 된다. 오늘 겨울 하루도 여지없이 공사 소음 대신 라흐마니노프가 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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