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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그조띠끄 김서윤 Oct 19. 2023

이제 사람들을 초대해 볼까? 아차산 단독주택 라이프

박공지붕 아래, 이야기는 끝이 없고 음악은 오랜 시간 부유했다.



"현관에는 석양만큼 달큰한 팔로산토의 온기를

거실에는 고요히 스며드는 샌달우드의 여운을

욕실에는 청량하게 스치는 베르가못의 잔상을"



집 구석구석, 공간 마다마다 향을 흩뿌리며 손님을 맞을 단장을 한다.   










쓰으윽 쓰으윽, 골목길 어디선가 눈 치우는 소리에 아침을 맞는다. 내 집 앞 눈은 각자 치워야 한다는데 눈은 또 어떻게 치워야 하나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창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어본다. 우와~ 입안의 침마저도 얼릴 듯한 매서운 투명한 대기 아래 정말로 눈이 한가득 내렸다. 뽀얀 햇살을 받아 더 뽀얗게 반짝이는 눈 속에 파묻힌 누군가의 발자국이 초등학교 겨울 방학, 눈 내린 아침을 회상케 한다. 문득 그런 날이면 엄마가 해주시던 김치수제비가 떠오르는 마음껏 나른해지고 게을러지는 아침. 정말 눈을 치워야 하는 걸까? 그런데 뭘로 치우지? 가지고 있는 온갖 장비를 바꿔가며 상상만 해볼 뿐, 한겨울의 파라다이스 같은 이 전기장판을 박차고 나올 용기는 없다.





눈이 내렸다. 

순전히 우연으로 별 감흥 없이 바라보던 첫눈이 내린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이렇게나 큰 눈이 쌓였다. '내 집 앞 눈을 빨리 안 치우면 신고당할지도 몰라. 벌금도 있으려나.' 주섬주섬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걸쳐 입고 양손에는 엉거주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중얼대며 현관을 나서는데 어머나, 없다! 눈이 없다! 우리 집 앞 골목길 눈은 이미 담장옆으로 곱게 치워져 있었다. 심지어 청록색 현관 진입로마저 말이다. 누굴까? 이 동네 어떤 분이 치운 것일까? 아니면 시청에서? 구청에서? 주민센터에서? 원래 해주는 거였나? 그저 다행이다 좋아하며 후딱 파라다이스로 다시 돌진할 뿐 의문을 더 이상 캐고 싶진 않다. 내 호기심은 언제나 나에게 유리할 때만 작동한다. 비밀은 간직해 줘야지. 으.... 얄미워. 




이 집의 풍경(시각)과 어울리는 차(미각), 향(후각), 음악(청각) 그리고 그것들이 조율해 낸 독특한 공기의 촉감(촉각)마저 깃들자 이 집을 더 애정하게 되었다. 나는 드디어 이 집과 사랑할 준비를 마친 것 같다. '오늘부터 우리 1일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쩌다 보니 이 집과의 연애가 내 실존의 다음 연애보다 앞서는 셈이 되었다. 이곳에서 우리 함께 많은 것들을 이루어 나가자고 달콤한 첫 속삭임을 한다. 앞으로의 그 과정이 지금까지처럼 치열하지만은 않을 거라고 환심을 사기 위해 더욱 달콤하게 속삭여주었다. 너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줄까? 



이그조띠끄 하우스 Exotique House



내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이국적인 정취'를 뜻하는 프랑스어 Exotique에 그 의미를 함축시켜 본다. 발음이 조금 어려우려나... 하지만 한글로도 영문으로도 글자 모양이 너무 예쁘잖아.




이제는 사람들을 초대해 볼까? 


이그조띠끄 하우스에 사람들을 초대하자. 남들도 나처럼 이곳을 좋아해 주었으면 하는 설렘으로 집 구석구석, 공간 마다마다 향을 흩뿌리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현관에는 팔로산토, 거실에는 샌달우드 향을 피우고 화장실에는 바다향으로 단장을 한다. 행여나 타일 바닥에 깨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에 좀처럼 꺼내지 않던 빈티지 와인잔을 내어놓고 탁해진 실버트레이도 박박 얼굴이 비칠 정도로 닦았다. 언젠가 그와(?) 설레게 마시려고 아껴둔 와인을 아침 일찍 꽃시장에 들러 구매한 꽃과 함께 버킷에 담았다. 아 음악! 여지없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의 비장하고도 처연한 사운드를 울린다.

    



‘쉼’이라는 스스로의 허락 아래 분간할 수 없는 하루하루가 느슨한 밀도로 빠르게 흘러갔다. 오늘과 어제와 내일의 구분이 모호한 하루들. 종종 오늘이 며칠인지를 헤아리다 서서히 사멸하는 겨울공기에 이제 침잠의 시간을 마무리하고 봄을 맞이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새 한층 온기를 품은 햇살에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거뜬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받는다. 그 지긋지긋하던 공사 소음도 공사 먼지도 이제 다시 견뎌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저 나만의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아본 이 집에서의 첫겨울이 끝나갈 즈음 보완해야 할 공정들이 자연스레 정리가 되었다. 불투명한 뿌연 비닐 대신 빛과 바람이 통과할 하얀 리넨 커튼을 달았다. 창문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비닐을 말끔하게 떼어내며 내 마음에 남겨진 미련도 떼어버린다. 무엇을 아니 누구를 향한 건지도 모르겠는 어떤 미련. 테이프자국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잘 지워지지 않는 부분은 묵은 때를 벗겨내듯 손톱으로 조심스레 살살 긁어낸다..... 한참을 떼어버려도 미련이 남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난겨울 있었던 모든 일들이 허구인 것만 같다.

어딘가에서 읽거나 봤을 뿐인 장면장면이 마치 내 것 인양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종종 혼자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이 가능할 만큼이나 겨울 끝에 다다르니 비현실적인 기억들뿐이다.


유유자적 겨울을 무람없이 소비했다.

지난 겨울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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