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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정 Feb 20. 2024

“죽음이 삶을 일으킨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새해 첫날 아내는 처형이 위암 4기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병명에 놀랄 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작년 말 가족 모임에서 평소와 달리 야위어 보였던 처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살이 빠져 보인다고 말하기에 멋쩍어서 다이어트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우리나라 사망원인 1위가 암이라고 하지만 주변에 암 환자가 없어서인지 암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암 4기가 어느 정도 심각한 것인지도 몰랐으니 나의 무지에 스스로 놀다.     


  

 입춘이 지난 설 연휴 마지막 날은 따뜻했다. 한 달 전 수술을 했고 설 연휴 전날 항암치료를 받은 처형에게 병문안을 하기 위해 아내가 연락했다. 산책하러 갈 복장으로 운동화를 신으라는 아내의 말에 다소 놀다. 암 수술과 항암치료로 거동이 불편해 병상에 누워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산책하러 가자고 하니 나아지려는 좋은 징조가 아닌가 하며 속으로 반겼다.      


 비탈진 언덕 아래로 따뜻한 햇볕은 언 땅을 녹이고 있었다. 포근한 날씨에 제법 푸릇푸릇한 새싹이 보였다. 곳곳의 진흙을 조심스레 비켜 가며 셋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처형은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고, 단순 역류성 식도염 정도로 생각했던 자신에게, 위암이라는 청천벽력이 떨어져 놀던 기억을 되살렸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건강을 챙겨 왔기에 왜 이런 병이 생겼는지 억울해했고, 생과 사의 경계에서 복통과 두려움으로 몸부림친 힘든 투병 생활을 말했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결의에 찬 말이 귓전을 울렸다. 젊은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병과 투병을 시작한 처형 앞에서 그 흔한 응원의 말도 입에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읽었다. 죽음 앞에 인생을 마무리하는 노교수와의 대담은 특별한 주제 없이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온갖 지식과 통찰 묻어나는 이야기로 가득했다. 작가의 질문에 노교수는 지식과 지혜를 샘처럼 쏟아냈다.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지식의 양과 사고의 깊이는 도대체 어느 정도 되는지,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사고의 시간을 가져야 저렇듯 막힘없이 세상의 이치와 인생을 꿰뚫을 수 있는지 범접할 수 없음을 느꼈다.     


 죽음에 대해 노교수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라고 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로 삶과 떨어질 수 없는 죽음을 이야기한다. 여섯 살에 겪은 어머니의 죽음부터 자신보다 앞서 보낸 딸과 손의 죽음, 이제 자신 앞에 놓인 죽음을 두고 매일 밤 어둠의 손목을 잡고 죽음과 팔씨름을 한다고 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똑바로 마주하며 죽음을 꿰뚫어 보려는 노교수의 의도가 느껴졌다.    

  

 죽음은 세상과 단절되어 철저히 홀로 되며 생명이 다해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예일대의 셀리 케이건교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영혼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고 죽으면 모든 것은 사라진다고 했다. 반면 노교수는 인간에게는 몸과 마음 이외 영혼까지 있고, 비어있는 영혼은 우주와 연결되어 있으며 공허의 공간이 신의 영역이라고 했다. 비어있는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지기 위해 인간은 채우기보다는 비워야 함을 강조한다. 기독교적 의미로 자기 뜻대로 살기보다 신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해서 자신을 비워야 함과 일치하는 것 같다.      


  그는 인간이 죽은 후 파뿌리 하나라도 남에게 베풀었다면 천국에 갈 수 있음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이야기 속에서 꺼내왔다. 아무리 이기적인 인간이라도 살면서 남에게 조그마한 선행을 베풀었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고 했다. 극한에 내몰려도 인간은 악마의 본성만 있는 것은 아니고 아주 선량하다고 할 순 없어도 보통의 인간은 다 선행을 베푼다고 했다. 천국 가는 기준을 낮추어 준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고 했다. 순간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것은 경험, 지식, 지혜가 풍부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 이야깃거리를 가졌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노교수는 관심, 관찰, 관계의 순서를 반복하며 스토리를 만들어왔다고 한다.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관심이 있어야 하고 관찰을 하다 보면 자신과 관계를 맺게 된다고 한다. 나이 들며 점차 삶이 무미건조해지고 이야기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세상에 관한 관심이 줄어드것은 아닌지 경종을 울리는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단지 언제 죽을지 모를 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동안 죽음을 망각하고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노화로 거동이 불편하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자식으로서 대처해야 할 일들이 떠오르지만, 좀체 움직여지지 않는다. 한없이 미루고 싶고 누가 대신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이별을 감당할 자신이 없고 슬프고 어두운 기운을 맞서는 것이 두려웠다. 죽음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이 싫은 것이다. 책을 읽으며 역설적으로 죽음이 삶을 일으킨다는 생각에 죽음을 똑바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죽음을 안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존재인 것처럼 살지 말라는 뜻으로 생각된다. 언제 갑자기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두려움이 들겠지만, 관계하는 사람, 사물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사형수가 된 도스토옙스키가 죽기 5분 전에 쓴 글에는 쓰레기도 아름답다고 노교수는 말한다. 다시는 못 보기에 소중한 것이라고 한다. 잠재적 사형수인 우리도 세상을 다시는 볼 수 없을 수 있기에 지금 펼쳐진 삶이 가장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처형이 편백 숲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정오 햇살은 빽빽한 숲으로 들어올 공간을 찾지 못했다. 따뜻한 기운보다는 맑고 차가운 숲의 공기가 가슴 안으로 들어온다. 암 환자에 좋다는 편백숲의 피톤치드가 처형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싶다. 처형은 운동이 부족한 아내에게 앞으로 매주 같이 이곳 산책하러 오자고 한다. 병에 맞서 앞장서는 처형의 뒤를 따라 아내와 나는 힘을 주어 걸어 내려왔다.     


 잘 살기 위해 죽음을 똑바로 보고 의미를 살필 때 관념상의 죽음은 사라지는 것 같다. 이 천년  로마의 개선장군 뒤로 ‘메멘토 모리’를 외치는 노예의 소리를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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