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엘지와 삼성 냉장고 중 어느 것을 살까,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국내 여행이냐 해외여행이냐, 지하철을 탈까 버스를 탈까 등등 우리는 매일매일 일상생활에서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한다. 그뿐인가 진학, 취업, 독립, 결혼처럼 삶의 모습이 많이 바뀌는 선택도 있다. 어떤 선택이 맞다 틀리다 할 수 없다. 정답은 없고 우리들은 매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다. 우리 가족도 많은 선택을 했다. 우리 가족의 삶의 방향이 크게 바꾼 몇 개의 선택이 떠오른다. 결혼, 남편의 창업, 나의 퇴사, 집 장만 - 그때의 선택으로 고생도 많이 했지만 얻은 것도 많다.
남편과 나는 IT개발자였다. 나는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일을 그만두었으니 IT개발자였다고 말하기 민망하다. 벌써 20년이 지났고 기술 발전이 얼마나 빠른지 내가 한때 관련 일을 했다는 사실이 나조차 믿기지 않는다. 쑥스럽고 민망해서 컴퓨터공학이 아니라 다른 학문을 전공했다고 말하고 싶다. 남편과 나는 입사동기이자 팀 동료로 만났다. 입사 당시 나의 꿈은 학업에 필요한 돈을 3년 동안 모으는 것이었다. 병역특례 연구원이었던 남편도 대체복무를 끝내고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했다. 입사하자마자 3년 만기로 붓기 시작한 적금 만기가 되기 전에, 남편의 대체복무가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결혼했다. 아이 둘을 낳고 알콩달콩 사는 재미에 공부를 계속하려고 했던 마음이 안개처럼 사라졌다.
남편이 동료들과 창업했다. 2000년대 초반 벤처기업 열풍이 불던 시절이다. “당신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돈은 내가 벌면 돼”라고 큰소리치며 남편을 서울로 보냈다. 남편은 서울에서, 나는 아이들과 대전에서 주말부부로 살았다. 나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던 기억 때문에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남들보다 강하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엄마 없는 집의 문을 스스로 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주말 부부 생활 6개월 만에 나도 회사를 그만두고 온 가족이 서울로 올라왔다. 퇴사가 아니라 휴직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문득문득 하지만 후회는 없다.
남편의 창업과 나의 퇴사로 소득이 4분의 1로 줄었다. ‘겁도 없구나. 안정된 회사를 왜 그만둬? 한 명은 계속 다니는 게 좋을 텐데.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네.’ 주변 사람들 모두 입을 모아 걱정했지만 정작 우리 부부는 아무렇지 않았다. 젊고 직장 있고 가족들 건강한데 무슨 걱정인가. 몇 년간 피자 먹는 날을 1년에 한 번으로 정해놓고 살아야 할 만큼 돈이 없었지만 가난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문제는 집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대전에서 분양받고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아파트를 매매한 돈과 퇴직금을 탈탈 털어 전셋집을 구했다. 전세 기간이 만료되는 2년마다 올려줘야 하는 보증금이 남편의 연봉보다 많았다.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이사할 때마다 집의 크기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아이들은 쑥쑥 크고 시아버지도 함께 살게 되었는데 말이다.
아팠다. 갑자기 눈물이 났고 아무 일도 없는데 심장이 쿵쿵대었고 이유도 없이 화가 났다. 서로의 동선이 환히 보이는 집에서 하루 종일 시아버지와 함께 있기 싫었다. 어디론가 가고 싶어도 갈 데가 없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나도 동네 도서관으로 갔다. 도서관에서 책도 읽고 300원짜리 커피도 마시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 나를 보고 이웃들은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하는 줄 오해를 했었다. 방이 하나만 더 있어도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을 샀다. 미쳤었다. 미친 사람이 못할 게 있을쏘냐. 은행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했다. 덕분에 등기부 등본에 나와 남편 이름이 등록된 우리 집이 생겼다. 비록 현관문과 방 1개와 부엌만 딱 우리 소유, 나머지 공간은 다 은행 것이지만 말이다. 2년마다 이사를 다니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 그때 우리 가족은 무얼 먹고 어떻게 살았지? 응원하는 야구팀 유니폼을 사달라는 큰 아이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던 기억은 아프다. 낡은 문짝이 떨어져도 새로 장만할 여력이 없어 문 없는 장롱을 몇 년 동안 사용했던 기억은 이제는 재미있는 일화다. 큰 아이는 공부를 싫어해서, 작은 아이는 혼자서도 잘해서 학원을 거의 보내지 않았다. 과천시에서 무료 혹은 저렴하게 운영하는 교육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했다, 덕분에 교육비가 많이 들지 않아서 그랬는지 살만 했다.
남편의 회사는 ICT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s technology 정보통신기술) 솔루션 개발업체이다. 통신망의 장애관리, 데이터 분석, 성능 관리 등등에 관련된 기술을 개발한다. “우리 회사는 개인 소비자가 아니라 기업을 고객으로 하기 때문에 대박도 없지만 쪽박 잘 일도 없다”던 남편의 말처럼 대박도 쪽박도 없이 회사가 자리를 잡았다. 더불어 우리 집 살림살이도 안정되었지만 우리 부부는 어느덧 50대가 되었고 남편이 많이 지쳤다.
지친 남편은 자연과 가까이 있고 싶어 했다. 자연을 향한 남편의 마음이 커지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살아오던 대로 살아도 될까? 남편은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지금 하던 일을 그만두면 먹고사는 것은 어떻게 하지?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나? 우리는 평생 도시에서 살 수 있을까? 몸은 아프고 마음은 힘들고 변화가 필요하지 않나? 작은 마당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시골은 어떨까?
이제 우리는 시골로 이사한다.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선택을 했다. 문경은 남편의 고향이지만 남편은 시골을 모른다. 시부모들은 농부가 아니었고 중2 때 서울로 이사 가서 더 그렇다. 도시도 아닌 시골도 아닌 대구 외곽지역에 살았던 나도 시골을 모른다. 양계장 딸내미였던 나는 자연에 관심이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대구 시내에 살았으니 자연과 친해질 기회가 더 없었다. 남편과 나는 시골과 자연에 대해서 완전 초보다. 이사 소식을 들은 한 친구가 나를 수식하는 말 중에 시골사람이 뉴요커보다 더 낯설고 어색하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변화이다.
남편과 만남, 결혼, 퇴사. 창업, 집 장만도 우리 가족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이번 이사가 삶의 방향성을 가장 많이 바꾸지 않을까? 매 선택마다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걱정이 많았지만 우리 가족은 제법 잘 살아냈다. 늘 그랬듯이 우리는 최선을 다하며 살 것이고 좋은 선택이었다고 먼 훗날 말하게 되리라. 한때 IT 개발자였지만 이제는 시골사람으로 멋지게 변화해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