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을 산다>
"결국 북한에는 돌아갈 수 없다. 한국에도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예전의 종주국인 일본에서 살지 않을 수 없게 됐지만, 일본에서밖에 살지 못하는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면 좋은가 하고 발버둥치며 찾은 것이 '재일을 산다'라는 명제였다."(174~5 페이지)
"내가 내건 '재일을 산다'는 두 개의 조국, 남북 어느 쪽인가에 종속해 사는 것이 아니고, 일본에서 살아온 '재일'의 실존을 독자의 생활문화로서 남북에도 어프로치할 수 있는 민족 융화의, 적극적인 전망으로 높여가는 생활방식의 제창이었다."(175 페이지)
일본의 식민통치, 4.3 사건, 남북 분단과 대립의 비극을 온 몸으로 뚫고 살아온 재일 시인 김시종씨가 자신이 일본에 사는 이유를 찾으며 만들어낸 조어가 '재일을 산다'이다. 그가 이 말을 처음 했을 때만 해도 총련을 비롯한 재일동포 쪽에서 '일본인화를 재촉하는 민족허무주의' 또는 '김시종의 망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을 쓴 지 10년 정도가 되는 1960년대 말부터 누구나 쓰는 상투어가 됐다.
<'재일'을 산다, 어느 시인의 투쟁사>(집영사신서, 2018)는 조국과 일본, 남과 북, 재일과 한국 사이의 갈등 속에서 독창적인 표현력을 단련해온 '재일 시인' 김시종씨(1929~)의 삶과 사상을, 대담을 통해 더듬은 책이다. 대담자는 일본의 전후 '양심의 발광체'(김 시인 표현)라고 할 수 있는 진보적인 사회평론가 사타카 마코토씨가 나섰다. 사타카씨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박식하고 깊은 지식을 구사하며, 구석구석에 감춰진 김 시인의 얘기를 끄집어낸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호흡을 맞추며, 김 시인의 삶과 사상뿐 아니라 일본의 현대사, 문학사를 여행하는 기분을 맛보게 한다. 김 시인의 시와 산문집이 최근 들어 국내에 많이 번역돼 소개되기 시작했으나, 이 책은 아직 번역본이 나오지 않았다.
김 시인은 내가 총영사로 재직했던 오사카총영사관 관할지역인 나라현 이코마에 산다. 그래서 비교적 자주 만나 얘기를 듣는 기회를 가졌다. 현재 재일동포 문인 중에서 소설에서는 <화산도>의 작가 김석범씨가 가장 유명하고, 시인 중에서는 단연 김시종씨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김 시인을 직접 만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나로선 더할 나위없는 행운이었다.
김 시인은 4.3 사건에 연루되어 1949년 밀항으로 일본에 건너왔다. 그 뒤 총련계 조직에서 문예활동을 하면서 지냈다. 그러나 50년대 말 일본어로 시를 쓴다는 이유로 조직에서 비판을 받고 11년 동안 표현 활동이 봉쇄됐다. 그의 첫 장편시집 <니가타>는 1959년 첫 북송선이 출발하는 것을 계기로 썼으나, 출판된 것은 1970년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총련 조직을 떠나 독자적으로 교육,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북쪽의 조직을 떠났어도 바로 남쪽 지향이 될 수 없었다. 군사독재정권의 남에 애정을 가질 수 없었다. 그가 비로소 한국 국적을 택하고 고향인 제주도를 방문하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다. 그는 지금도 시뿐 아니라 산문 창작, 강연, 인터뷰 등의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일본 사회의 소금 같은 노릇을 하고 있다.
이 책은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전전회귀의 기점'에서, 김 시인은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고 몸부림치며 통곡하던 황국 소년의 모습과,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는 일본어에 물들었던 자신의 옛 모습을 담담하게 밝힌다. 또 일본어가 메이지유신 때 표준화되면서 조선인을 식별해 차별하는 배타적인 언어로 기능하게 된 배경도 논파한다. 제2장 '노래와의 싸움'에서는, 일본의 노래, 즉 단가와 동요, 연가 등이 사람의 심정에만 호소함으로써, 생각하는 힘을 거세하고, 결국 지배자의 쪽에 동조하게 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는 점을 지적한다. 김 시인의 시 언어는 철저하게 일본의 서정으로부터 탈피를 특징으로 하는데, 그는 이런 시 창작관을 오노 도자부로로부터 배웠다고 한다.
제3장 '사회주의와 기도'에서는 첫 장편시 <니가타>의 창작 얘기와 '재일을 산다'는 말을 찾게 된 과정이 나온다. 니가타는 북송선이 출발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한반도의 남북을 가르고 있는 38선이 통과하는 일본의 도시다. 여기서 조국에서 넘을 수 없는 38선을 일본에서 넘을 수 있다는 점이 창작의 동기가 됐고, 이를 넘은 뒤엔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고뇌 속에서 찾은 말이 '재일을 산다'이다. 제4장 '차별을 넘다'에서는 고베의 부락민 학생이 많이 다니는 미나토가와고교(정시제)에서 조선어 교사로서 부락민 학생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고투한 얘기가 나온다. 김 시인은 일본 교육사상 최초로 조선어가 정규 교과가 된 이 학교에서, 재일동포 최초의 공립고 교사가 됐다. 이때가 그의 나이 44살 때인 1975년이다. 이 학교에서 깡패처럼 선생에게 대드는 부락 출신 학생과 부딪히며 끝내 신뢰와 애정을 쌓아가는 모습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김 시인을 이런 경험을 통해 차별 피해자로서 재일동포의 운동방향도 타자 비판보다 자기 반성이 필요함을 인식한다.
제5장 '문학과 전쟁 책임'에서는 일본의 신인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만든 기쿠치 히로시 문예춘추사 창립자가 도마에 오른다. 그가 일본의 조선어 말살정책 이후 조선에 아쿠타가와상과 비슷한 성격의 조선예술상을 만든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심사위원도 기쿠치를 비롯해 아쿠타가와상 심사위원들이 거의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한국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는 내용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친척처럼 지냈던, 대표적인 재일동포 소설가 김달수씨와 관계, 특히 김씨가 빨치산 이야기를 다룬 <지리산>을 현장 조사의 난점으로 더 진전시키지 못하고 <일본 속의 조선문화>라는 잡지를 거점으로 한 문화답사에 경도된 것을 비판한 것이 둘 사이를 멀어지게 한 사실도 털어놨다. 마지막 제6장 '나라를 넘어 나라로'에서는 최근의 납치와 미사일 등을 조성된 북일관계와 한반도 평화 등의 현안 정치 문제를 다룬다. 김 시인은 태어난 뒤 한 번도 한 나라를 이루지 못한 때문에 한 나라를 이루는 것을 보는 것이 바람이라면서, 하나로 된 국가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찌 국가를 버릴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최대의 꿈은 남북과 일본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 즉 '재일을 살면서' 조국의 통일에 기여하는 것이 아닐까.
김 시인은 이제 90살이 넘었다. 건강도 여기저기 탈이 생기고 있다. 코로나 사태로 매년 몇 차례 하던 고국 방문도 2년 가까이 못하고 있다. 코로나가 종식돼 김 시인이 서울에 오면, 그가 좋아하는 '제일 강하게 삭힌 홍어회'와 막걸리를 꼭 대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