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서영 Oct 22. 2023

세 여자의 해방

“아직 배 쪽은 따뜻해요. 만져보세요.”


남순의 임종이 임박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차를 몰아 고속도로에 진입했을 때였다. 혜순이 두 번째 전화를 받았고 나는 운전을 하고 있었다.


“아이고, 어머니는 그렇게 급하게……”


두 번째 전화는 남순의 죽음을 전했다. 임종 소식에 혜순은 탄식을 내뱉었고, 나는 오히려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평생 그렇게 두려워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자 두려움은 사라지고 공허함이 밀려왔다. 아이고, 이 남순 여사님, 누가 성격 급한 거 아니랄까 봐. 마지막도 남순 답다 생각했다. 한 시간 반을 달려 도착했을 땐 이미 시체검안서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임종을 지켜준 사람 말로는 그렇게 힘들지 않게 편하게 가셨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아직 배 쪽에 온기가 있었다.


“어머니, 편히 가셔요.”


혜순은 평생 마음의 시집살이를 시켰던 남순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리고 울었다.


“할매는 쪼매만 더 기다렸다 내 보고 가지. 끝까지 치사하게 이러기가. 아빠랑 할배 얼른 보고 싶어가 그마이 서둘러 갔나.”


울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울면 곤란하니까.


혜순이 남순의 수의와 영정 사진을 챙겨 오는 동안 나는 앰뷸런스를 불러 남순과 함께 성당 장례식장으로 갔다. 대구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살아생전 남순이 열심히 다녔던 곳이었다. 취직을 하고 대구를 떠나기 전까지 남순을 따라 혜순과 나도 일요일마다 주말 미사를 보러 매주 다녔기에 익숙한 곳이었다. 남순은 분명 그 성당에서 당신의 장례식을 치르고 싶어 했을 것이었다. 혜순이 성당 장례식장에 전화를 걸어 자리가 있는지 물었고 마침 자리가 있다는 답변을 받은 건 남순의 마지막 복이었다.


“이번에 벌써 여기가 세 번째네.”


씁쓸할 웃음을 지으며 혜순이 말했다. 선욱, 병철, 그리고 남순까지. 같은 성당에서 치르는 세 번째 장례라는 말이었다.


“그러게. 엄마는 벌써 세 번째겠네. 나는 두 번짼데.”


남순과 함께 장례식장에 먼저 도착한 나는 혜순 없이 혼자 필요한 절차를 밟았다. 상주가 누구냐는 담장자의 질문에 내가 상주라고 대답했다. 다른 성인 남자는 없냐고 다시 물었고, 나는 없다고 했다. 여자 상복은 혜순을 위해 한 벌만 빌렸다. 나는 내가 가져온 검은색 정장을 입을 것이니 상주완장만 대여하고 싶다고 했다. 신청 양식을 작성하고 관을 고르기 위해 브로셔를 보며 장례용품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했고 담당자는 내 질문에 석연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신청양식에 상주 사인을 마치고 담당자에게 넘기자 곤란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아들도 손자도 없으면 사위나 조카 되는 분도 없으신가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평소 애정했던 성당에서 이런 일을 겪으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도 났다.


“예. 사위도 없습니다. 평생 가족으로 지냈던 손녀가 있는데 연락도 잘 안 되는 조카를 상주로 세울 이유 없습니다. 장례용품 올려 보내실 때 상주완장 꼭 잊지 말고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당부를 했건만 역시나 대여한 장례용품에서 상주완장은 빠져있었고 거듭 요청을 한 후에야 겨우 받았다. 나는 마침내 상주가 될 수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병철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도 이곳이었다. 남순은 빈소에 성인 남성이 서 있는 것이 남들 보기 좋다며 병철의 조카에게 상주노릇을 부탁하고 고마움의 뜻으로 조의금으로 들어온 돈을 전부 주었다. 돈 문제로 틀어져 명절에도 전화 한 통 오가지 않는 사이였다. 상주는 고인의 죽음을 가장 슬퍼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는데 하나도 슬프지 않은 표정의 누군가가 병철의 영정사진을 드는 것이 싫었다. 완장은 못 차더라도 영정 사진만은 내가 들고 싶었다. 세상에서 병철의 죽음에 가장 슬퍼하고 있는 사람은 나인 게 분명했으니까. 장례미사를 치르기 위해 운구를 할 때 영정사진을 든 상주와 병철의 다른 남자 조카들이 앞서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병철의 관이 잘 보이지 않을 아득했다. 꼭 그만큼의 거리감을 느끼며 중학생이었던 나는 다짐했다. 남순의 장례는 내 손으로 꼭 치르겠다고. 다른 사람이 상주가 되어 남순의 영정사진을 드는 일은 없을 거라고.


혜순은 장례식장에서 자는 게 무섭다며 친한 친구를 불렀다. 장례 첫째 날 밤 둘이 방에서 잠을 청할 동안 나는 냉장고에서 꺼낸 소주 한 병을 들고 불이 꺼진 빈소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60대의 남순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다. 부리부리한 눈에 넓적한 얼굴, 완벽하게 손질된 헤어와 빨간 입술. 그러고 보니 내 눈매와 입술은 선욱보다는 남순을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더 열심히 공부해서 다음에는 반드시 1등을 하라고 다그칠 것 같은 남순의 얼굴 앞에 소주 한 잔을 따라 올렸다. 내 잔도 채웠다. 그러고 보니 눈매와 입술뿐만 아니라 주량도 남순을 닮았다. 병철도 선욱(들은 바로는)도 혜순도 술을 즐기긴  했지만 주량이 많은 편은 아니었으니 소주 한 병 반을 마시는 내 유전자는 영락없이 남순으로부터 온 게 틀림없었다. 회를 좋아하는 남순과 나는 종종 둘이서 회 한 접시를 배달시켜 안주로 삼곤 했다. 술 중에서 위스키를 가장 좋아했던 남순은 지인을 통해 나도 처음 보는 고급 위스키를 구해오곤 했다. 석 잔 정도 술이 들어가면 남순의 레퍼토리가 시작된다. 당연히 선욱의 이야기였고 그 이야기의 끝은 매번 같았다.


“나는 하늘 나는 새가 젤 부럽다. 새가 돼서 니 아빠 있는 데로 훨훨 날아갔으면 얼마나 좋겠노.”


“새 좋지. 훨훨 나는 것도 좋고. 근데 할배가 들으면 섭섭하겠는데? 할매는 맨날천날 아빠만 보고 싶다 카고…… 신랑은 하나도 안 보고 싶은 갑소?”


“거나거나(거기나 거기나). 어차피 다 한 곳에 있을낀데, 뭐.”


그런가. 나는 파하하 웃으며 반쯤 남은 잔을 비우고 젓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렸다.


천동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 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굽이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내 젓가락 박자에 맞춰 남순도 따라 불렀다. 남순의 18번이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의 부분에 다다르면 우리는 가슴을 치는 시늉을 하며 소리를 더 높였다.



이틀 째 날 입관식을 치르기 위해 상복을 챙겨 입었다. 남순을 마지막으로 보는 시간이었다. 17년 전 병철의 입관식 때가 떠올랐다. 혜순은 굳어있는 내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눈 꼭 감고 보지 마. 시신을 염습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트라우마가 생길까 봐 걱정한 것이었다. 죽은 병철을 보는 게 무섭긴 했다. 그래서 혜순의 말대로 입관식 내내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병철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나에게는 첫 입관식인 셈이었다. 남순의 마지막은 꼭 지켜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차가운 금속판에 누워있는 남순의 몸은 더 작아 보였다. 한 시간가량 진행된 입관식이 끝나고 장례지도사가 고인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라고 했다. 고인의 이마를 짚으며 이렇게 하는 거라고 시범을 보여주었다. 혜순이 먼저 남순의 이마를 짚으며 어머니 잘 가셔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했다. 나는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어 남순의 이마만 쳐다봤다.


“상주 분, 손바닥으로 이마 짚으면서 마지막 인사 하세요.”


겨우 팔을 들어 남순의 이마로 가져가는 내 오른손이 덜덜 떨리는 게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이마에 손바닥이 닿자 뼛속까지 냉기가 훅 들어왔다. 할매, 마이 추웠겠네. 나는 혜순처럼 소리 내어 마지막 인사를 하지 못했다. 죽음은 얼음처럼 시렸다.


장례미사를 위해 운구를 해야 하는데 관을 들 사람이 부족했다. 영정사진을 잠시 내려놓고 관을 옮기는 걸 도왔다. 상주는 원래 관을 들지 않는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련된 산소로 가는 길에도 운구를 할 사람이 부족해 한 손으로 영정사진을 다른 한 손으로 관을 들었다. 하관을 할 때도 관을 내리는 끈을 잡았다. 상관없었다. 장례법 따윈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 손'으로 보내주겠다는 남순과의 약속을 최선을 다해 지킬 수 있는 게, 그래서 살아생전 말 안 듣던 손녀 때문에 속상했을 남순이 마음을 풀고 떠나는 것이 그 순간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남순을 선욱의 옆자리에 눕히고 장지를 떠날 때까지 나는 울지 않았다. 혹시라도 울음이 터지면 주체할 자신이 없었다. 울음을 참느라 눈은 충혈되었지만 꿋꿋하게 마른 얼굴을 유지하고 있던 나와는 다르게 혜순은 장례미사 때부터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와 남순도 징했으나 ‘애증'으로 말할 것 같으면 혜순과 남순도 만만치 않았다. 같이 한 세월이 있으니 피가 섞이지 않았다 해도 정이라는 게 쌓였을 테고, 심지어 둘 사이에 쌓인 정은 정 중에서도 가장 무섭다는 ‘미운 정'이 아닌가. 나뿐만 아니라 혜순도 남순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을 것이다. 남순이 혜순의 못마땅한 점을 불평할 때마다 언급하던 것은 ‘안동 권 씨'였다. 안동 권 씨가 양반이라는 거 하나 믿고 선욱과의 결혼을 허락했다며 '그거 하나'마음에 든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남순의 안목은 틀리지 않은 셈이었다. 조선시대도 아닌데 결혼 1년 차에 남편을 잃은 이 십 대의 어린 며느리가 35년 동안 시모의 바람대로 ‘호적을 가져가지 않고' 며느리의 역할을 다했으니까. 남순의 성에 찰 만큼 싹싹하고 고분고분한 ‘시근 머리'는 없었을지 몰라도 가까운 곳에 항상 머무르며 남순이 아프다면 병원으로 약국으로 데려 다니고, 먹고 싶다면 소고기든 보신탕이든 사다 바치며 며느리의 도리를 충실히 다한 혜순이었다. 남순이 콧줄을 빼고 퇴원하던 날 혜순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말했다.


“할머니가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엄마 쪽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더라.”


“뭐라고?”


“애미야, 그동안 니 고생 많았데이.”


혜순이 평생 남순에게서 듣고 싶어 했던 말이었다. 그 말 한마디면 그렇게 외롭다는 남순을 한 번이라도 더 보러 갔을 거라고.


“그러게 할매는 진작 그 말 좀 해 주지.”


“우리 딸이 할매 대신 한 번 해 줘 봐.”


나는 목구멍에 올라오는 뜨거운 것을 삼키며 혜순을 꼭 안았다.


“엄마, 긴 세월 동안 시집살이 한다고 수고 많았데이. 누가 뭐래도 내 기준에 엄마는 효부상 감 며느리였다.”



장례식이 끝나고 혜순의 집으로 돌아온 그날 저녁 우리는 맥주를 나눠 마셨다.


“장례 치를 때는 원래 ‘짠'하는 거 아니지만 누가 욕한다 캐도 우리는 오늘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소리냐는 듯 혜순이 나를 바라봤다.


“오늘은 세 여자가 드디어 해방된 기쁜 날이니까.”


“해방?”


“해방! 엄마는 평생 숙제 같았던 시집살이에서 해방됐잖아. 할매랑 눈빛으로 서로 용서하고 화해했다 했으니까 마음 후련할 거고. 나도 잘난 아빠의 빛에 가려서 평생 그늘에 있었잖아. ‘덜 잘난 손녀'로. 효도 백 날 하면 뭐하노. 세상 최악의 불효로 부모 가슴에 못을 박았는데. 부모의 마지막을 잘 배웅하는 게 최고의 효도 아니가? 그러니까 오늘 내가 비로소 아빠를 이긴 것 같다, 이 말이지. 그리고 할매도 이제 아픈 몸에서 벗어나 새처럼 훨훨 날아서 지금쯤 그렇게 그리워하던 아빠 보러 갔을 거니까. 이 정도면 세  여자 해방의 축배를 들만하지”


우리는 맥주잔을 부딪치고 시원하게 원샷했다. 세 여자는 시집살이와 손녀살이 그리고 그리움에서 해방되었다. 그날 우리는 밤이 늦도록 과거와 남순에 대해 이야기하며 웃다가 울다가 다시 웃다가 했다.


그건 남순을 추모하는 우리의 방식이었다.


이전 21화 연명치료거부 신청 동의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