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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서영 Oct 22. 2023

마지막은 복병처럼

5년 만에 한국을 방문하고 한 달 후 벚꽃이 한껏 피고 있을 때 다시 캐나다로 왔다. 2020년 코로나로 전 세계가 공포와 살기에 휩싸여 있을 때였다. 캐나다에서 다니던 직장에서는 일이 없어 일시적 해고를 당한 상태였다. 모든 것이 불안했지만 그래도 5년 동안 마음속에 짐처럼 느껴졌던 숙원이 하나 해결된 느낌이었다. 사실 ‘해결'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남순이 내가 건 국제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코로나를 불사한 한국 방문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한국에서 돌아온 지 백일 쯤 지났을 때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남순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는데 이틀 내내 전화를 받지 않아 혜순에게 물었다. 그렇게 들었다. 남순이 넘어졌다는 것을. 거동이 불편한 남순이 집 베란다를 나가다 휘청하는 바람에 넘어졌고 넘어지며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혔다고 했다. 전화를 받고 달려간 혜순이 도착해 보니 남순은 소파에 일 자로 누워 좀 쉬면 괜찮겠지, 했단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서야 병원에 모시고 갔는데 뇌경색과 뇌출혈이 같이 있어 손을 쓸 방법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나에게 전했다. 무서운 말이었다. 뇌손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데 현대 의학으로 손 쓸 방법이 없다니 ‘죽을 때까지 기다립시다'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상황이라니. 병원에 입원해 있을 남순이 그려졌다. 병원을 싫어하던 남순은 이번에도 집에 가야 된다고 혜순에게 고집을 피웠다고 했다.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나는 선뜻 전화를 걸 수 없었다. 남순에게는 전화와 문자 같은 기본 기능만 갖춘 낡은 효도폰이 있었다. 그 휴대폰을 생명줄처럼 가지고 다녔다. 혜순이 나에게 전했다. 입원해 있는 남순이 내게서 전화가 올지 모른다며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으니 전화를 하라고. 나는 차마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전화를 걸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당신이 이렇게 아픈데 왜 캐나다에 있냐고 나를 원망할 것 같았다 아니, 나는 이미 내가 원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벽 3시에 그렇게 전화를 해오던 남순이었는데 그때는 왜 내 전화를 기다리기만 한 걸까. 병원에서 주는 약을 꾸준히 먹고 있다고 하니까 곧 괜찮아지겠지. 병원에서 퇴원하면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안부를 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날 혜순은 나에게 남순이 침대에 누운 채 말을 하지도 일어나지도 못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수술이라도 하라고 왜 그러고 있냐고 나는 전화기를 통해 혜순에게 울부짖었고, 나이가 너무 많은 환자는 병원에서 수술해 주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뇌손상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처음으로 캐나다에 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코로나 때문에 지금 당장 한국에 들어간다고 해도 2주의 격리는 불가피했다. 만약 격리 중에 남순이 떠난다면 장례식도 못 치를 것이었다. 가족이 사망하는 경우에 한해서 격리를 면제해 주는 법이 시행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남순의 숨이 떨어지기만 기다리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 갈 수도 없었다. 사망확인서를 받아 영사관에 제출해 면제허가를 받은 후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하면 장례식은 이미 끝나있을 것이었다. 한국행 티켓을 끊으며 혜순에게 전화했다.


“엄마, 내 지금 갈 테니까 격리 끝날 때까지는 엄마가 책임지고 무조건 할매 살려놔래이. 할매 장례는 내 손으로 치를 거니까.”

한국에 도착해 혜순의 집 내 방에서 격리 생활을 하면서 2주가 20년 같이 느껴졌다. 체감상 10년 정도 지났다고 느꼈을 때 문병을 다녀온 혜순은 대학병원에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으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말고 집으로 모시든지 요양병원으로 옮기든지 하라는 병원의 입장을 전했다. 집으로 데려올 수는 없으니 요양병원으로 옮기자는 결론을 내렸고 격리만 끝나면 남순을 보러 가리라, 1분 1초를 고스란히 느끼며 격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지만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코로나 때문에 병문안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고 병원 안내 데스크로부터 방문 신청을 하고 나서 보통 2주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절망적인 답변을 들었다. 예외없이 삶의 불행들은 내 뒤통수를 노리는 복병처럼 ‘설마'라는 방패를 들고 ‘하필’이라는 창으로 ‘역시나'의 급소를 찔렀다.


2주나 기다릴 수 없어 사정을 봐달라고 하루에 두 번씩 병원에 전화를 걸어 사정한 결과 격리가 끝난 지 그나마 열흘 만에 방문 허가 승인이 났다. 병원에 도착해 멸균복을 입는데 영하 30도의 날씨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온몸이 덜덜 떨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남순이 누워있는 입원실로 걸어가는 길은 마치 지옥 같았다. 내가 아는 남순이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일까 봐 무섭고 슬프고 두려웠다. 그대로 주저앉아 남순을 만나는 것도 울음을 참는 것도 덤덤한 척을 하는 것도 전부 포기하고 싶었다. 4개월 만에 만난 남순은 5년 만에 봤을 때보다 열 배는 변해있었다. 의식도 없이 눈만 뜨고 있다고 했는데 내가 가까이 가자 남순은 눈물을 흘리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병원 관계자도 간호사도 혜순도 예상치 못한 일이라 깜짝 놀랐다. 혜순과 나에게 멸균복을 제공해 준 병원 관계자가 남순의 손을 잡으려는 나를 제지했다. 신체 접촉을 하는 순간 이 병원에 다시는 출입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지금 당장 병원밖으로 추방당할 것이라고 했다. 내가 보이는 건 지 들리는 건 지 내가 서있는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남순의 동공에는 초점이 없었고 입에서는 사람의 울음이라기보다 짐승의 그것 같은 소리가 났다. 들어 올린 손을 잡을 수가 없어 나는 추방을 당하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아슬아슬하게 지키며 소리쳤다. 할매, 소녀 왔다. 내가 너무 늦게 왔쟤. 근데 손 잡으면 내 여기서 쫓겨난단다. 그래서 못 잡는다. 미안하데이. 점점 더 떨리던 내 목소리는 ‘미안'을 에 이르자 남순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소리가 났다.


그냥 잡을걸. 쫓겨나더라도 손을 꽉 잡아줄걸. 남순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서야 후회가 됐다. 열흘이 지나 남순을 다시 보러 갔을 때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보이는지 들리는지 감각은 있는지 생각은 하는지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의식이 있는 거라면 누구보다 남순이 가장 답답할 거였다. 5개월 전 한국을 다녀갔을 때 캐나다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남순에게 인사를 하러 들렀다. 지금 인천공항으로 간다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할매, 내 오늘 비행기 타러 간데이. 또 오께. 이제 자주 오께.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를 배웅하던 남순의 표정이 생각보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라는 생각 했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에 남순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니 좋아하는 시락국(시래기 된장국) 끓여놨다. 내일 와서 묵고 가라.”

“...... 할매, 내 오늘 캐나다 간다니까. 그래서 아까 인사하러 간긴데.”


3급 청각 장애인이었던 남순은 귀가 잘 안 들렸다. 어쩐지 문을 나설 때 표정이 괜찮아 보이더라니. 비행기를 타러 간다는 말을 듣지 못했던 것이었다. 어쩌면 나는 이 상황을 바랐던 건지도 몰랐다. 얼굴을 마주 보고 캐나다에 다시 간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안 가면 안 되냐고 할 것 같아서, 그러면 나는 또 울지 않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나는 남순이 ‘비행기'나 ‘캐나다'라는 말을 듣지 못하게 얼버무리며 말한 건 지도 몰랐다. 시래기 된장국을 자꾸 먹고 가라고 하는 남순에게 ‘비행기와 캐나다'를 여러 번 소리쳐 말하고 나서야 남순은 겨우 알아들었다.


“오늘 간다꼬? …… 그러면 또 언제 보겠노…… 손이라도 함 잡아주고 갈 것 아이가(가지 그랬니).”


나이가 들고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지는 걸까. 눈물을 보이면 남들이 무시한다며 내가 눈물 한 방울만 흘려도 매섭게 혼내던 남순은 이제 아기가 된 것처럼 자주 울음을 터뜨렸다. 아들에게는 감성과 사랑의 어머니였으나 손녀에게는 평생 이성과 훈육의 할머니였다. 언제나 냉철하고 엄하기만 했던 남순이 내가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고 서운해하다니, 처음 보는 남순의 모습에 나는 당황했다. 다음에 한국 가면 그때 꼭 잡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게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더 이상 나를 향해 손을 들지 않는 남순을 보며 손을 잡아주겠다는 약속을 끝내 못 지켰다는 사실과 내가 제일 좋아하던 남순의 시래기 된장국을 이제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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