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서영 Oct 22. 2023

진 자리 마른자리

초등학교 입학 후 학년이 바뀌고 새로운 반과 담임이 배정되는 년 초 시즌이 되면 남순은 내 이브자리 머리맡에 작은 물이 담긴 양동이와 수건을 챙겼다. 매일 악몽을 꾸던 나는 학기 초만 되면 그 증상이 심해져 새벽마다 이불에 토했다. 정말 매일 같이 토했기 때문에 오늘 밤도 어젯밤과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았고 그래서 나는 잠드는 게 두려웠다. 20대까지 나를 괴롭혔던 고질적인 수면 장애가 생긴 것은 아마도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한다. 어김없이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쯤 구토를 했는데 그때마다 남순은 조용히 일어나 준비해 둔 머리맡의 수건과 물로 토사물을 치웠다. 매일 밤 토하는 나를 그래도 비닐 위에서 재우지 않고 묵묵히 수건과 대야를 머리맡에 두었던 것은 손녀에 대한 애정이었다고 생각한다. 훗날 남순과 내가 물리적으로 떨어진(내 멋대로 살기 시작한) 이후 나에 대한 섭섭함을 토로할 때마다 당신이 얼마나 나를 (진 자리 마른자리 가려 눕히며) 애지중지 키웠는지 아냐고 했고, 그 말을 들은 혜순은 '할머니가 손녀 누운 자리 가려주는 게 당연하지 그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 생색을 내실까'하며 죄책감을 느끼는 나를 달래곤 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혜순과 함께 지내게 되면서 남순은 혼자 살게 되었고 대학생이 된 나에게 자주 전화를 했다. 며느리보다는 그래도 피가 섞인 손녀가 편했으리라. 전화를 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약국 심부름이나 식료품을 사 오라는 것 따위였는데 그런 날은 강의가 비어있는 세네 시간 사이에 왕복 2시간 거리의 남순에게 다녀와야 했다. 대학교 졸업 후 직장을 타지에 잡게 되어 대구를 떠날 때 남순은 걱정을 했다. 니가 가버리면 나는 우야노. 주말에 종종 내려올 건데 내 뭐 어데 멀리 갑니꺼. 하지만 주말 특근과 약속들이 이어져 남순에게 한 약속을 지키는 주말은 점점 드물어졌다. 남순은 나에 대한 섭섭함이 점점 커지는 듯했고, 나이가 들면 점점 어린애가 된다더니 남순은 당신에 대한 애정과 충성을 확인하듯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한 번은 남순이 수술을 하게 되어 입원을 했는데 간병인이 시켜주는 목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때를 밀어주러 주말에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당시에 회사일이 바쁠 때라 토요일에도 야근을 해야 해서 쉬는 날은 일요일 밖에 없다고 다음 주에 가겠다고 했으나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일요일 아침에 남순이 입원해 있던 대구에 있는 병원으로 가 두 시간에 걸쳐 남순의 몸을 씻겨주고 그 길로 바로 올라와야 했다. 그 말을 전하면 혜순은 화를 낼 것이 분명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순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달하지 않는 편이 더 이상의 고부간의 갈등을 키우지 않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남순이 내게 한 무리한 요구에 나는 두통을 겪었으나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를 키워 준 사람'이었다.


‘의사 손녀 만들기' 프로젝트에 처참히 실패한 남순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두 번째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그건  ‘의사 손주사위 얻기'였다. 이 십 대 중반이 넘어가자 남순은 갖은 인맥을 다 동원하여 선자리를 마련했고 몇 번 고사를 하다 결국에는 ‘만나보고 나서 싫다고 하면 설마 뭐라고 하겠어?’싶은 생각에 일단 선자리에 나가기 시작했고 ‘설마'는 함부로 붙이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또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됐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사람이었는데 한 번 보고 내가 마음에 든다는 전화를 받았다고 남순이 전했다. 사실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혹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사람을 한 번 보고 알 수는 없기 때문에 그 상대를 ‘싫다 혹은 좋다'로 단정 짓긴 어려웠지만 일단 내 목적은 만나보고 거절하면 명분이라도 있겠지, 였다. 연애나 결혼 의사가 전혀 없었기에 ‘내가 마음에 든다'는 적극적인 의사표현이 더 부담스러웠다. 상대방 쪽에서 두 번째 전화를 걸어오던 날 남순은 나에게 말했다. 그냥 고마 가거라. 가라니, 도대체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남순의 짧은 한 마디에 숨어있는 뜻을 나는 모를 수 없었다.


그냥 = 이것저것 재지 말고 너 좋다는 사람 있을 때

고마 = 어영부영하다 여자 나이 가장 먹히는 이 십 대 중후반을 넘기지 말고

가거라 = 시집을 가거라


아니 한 번 더 만나 보라는 것도 아니고 이대로 결혼 수락을 하라고? 그리고 애초에 그쪽에서도 딱 한 번 본 나에게 구혼을 했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짐했다. 더 이상 남순이 주선하는 선자리는 아니, 어떤 선자리에도 나가지 않겠다고. 내가 완강하게 의사표현을 밣히자 아무리 남순이라 해도 조선시대가 아닌데 싫다는 애를 억지로 잡아끌어 꽃가마에 밀어 넣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소개팅이고 맞선이고 나가라니 그냥 나갔다. 그런데 그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나는 아직 결혼이라는 걸 할 생각도 결혼을 전제로 한 연애를 할 생각도 없었다. 혼자서 신나고 가볍게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며느리로 또 누군가의 엄마로 살면서 그런 걸 할 수는 없을 것 같았고 그건 분명 욕심일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모한 결단을 했다. 정확히 10년 전 무산되었던 캐나다행을 감행하기로. 여행자가 아닌 거주자로서 캐나다라는 곳에 속해서 살아보고 싶었다. 당시 대기업 4년 차를 마무리하는 시점이었고 고과 4점을 채웠기에 큰 이변이 없는 한 대리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이 십 대 후반에 대기업 대리 사원증을 목에 건 상상 속에 내 모습은 꽤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 십 대의 패기인지 치기인지 안정적인 삶을 사는 무료한 직장인보다 ‘사서 고생’을 기꺼이 자처하며 이것저것 도전해 보는 상상 속의 내 모습이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갑자기 캐나다로 떠난다고 전한 사람들 모두 ‘용기가 멋지다'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서 부러움보다는 의심과 불안이 더 크게 보였고 그건 내 마음이 투영된 것일 확률이 컸다. 에이포 용지를 반으로 접어 왼쪽에는 ‘제1안, 그냥 이대로 산다', 오른쪽에는 ‘제2안, 캐나다에 간다'를 적은 후 또 그것을 반으로 접어 떠오르는 대로 1안의 장단점과 2안의 장단점을 파란 펜과 빨간펜으로 나눠 적었다.


제1안, 그냥 이대로 산다

장점 : 꼬박꼬박 나오는 훌륭한 월급과 복지, 안정감, 대기업이라는 울타리, 긍정적인 사회적 시선

단점 : 계속되는 미련, 훗날의 후회


제2안, 캐나다에 간다

장점 : 새로운 경험, 기회, 한풀이, 설렘

단점 : 배고픔, 가까운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 언어장벽, 문화차이, 인종차별, 부적응에 대한 위험


한눈에 봐도 2안에 해당하는 부분은 시뻘겋게 단점의 행렬이 종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에 비해 1안은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았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나는 깔끔하게 제2안을 포기하고 ‘대리'라고 적힌 반짝이는 사원증을 목에 걸고 제1안으로 살아야 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1안의 단점이 마음에 걸렸다. 오늘 하지 않으면 매일 아침 출근길마다 ‘언젠가는'을 생각할 것이고, 그런 날들이 차곡차곡 쌓여 어느덧 10년이 지나고 나면 10년 전에 하지 않았던 일을 더 크게 후회할지도 몰랐다. 아무리 배가 고프고 불안해도 미련과 후회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결국 사표를 쓰고 캐나다 토론토행 비행기 티켓을 샀다. 난생처음 산 편도 행 항공권이었다.


‘손녀 의대 보내기’ 프로젝트와 ‘의사 손주사위 얻기' 프로젝트 모두 실패한 남순은 내가 회사를 다니는 내내 ‘그렇다면 차라리 삼촌과 이모가 있는 캐나다에 가서 석박사를 하고 교수가 돼라'는 말을 버릇처럼 했다. 삼촌과 이모가 있는 곳에서 유학을 하며 신세 지고 싶은 생각도, 교수가 될 계획도(자신도) 없었으나 일단 캐나다에 가는 건 매한가지이니 나는 남순이 내 결정에 유감이 없을 것이라 내심 기대했다. 두 손 들어 반기지는 않는다 해도 ‘그래 고마 잘 생각했다' 하며 체념으로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그렇듯 우리의 안일한 안심에 뒤통수를 때리고 마는 게 삶이었지. 처음 내 결정을 들은 남순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듯 보였으나 출국날이 다가올수록 다양한 방법으로 내 의지를 돌리려 애썼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며 키웠는데 네가 우애 그 칼 수 있노(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불같은 역정을 냈다가 ‘니가 가면 나는 우애 사노(어떻게 사냐)’며 울었다가 ‘가지 마라, 안 가는 게 맞다'며 단호하게 다그쳤다가…… 하루에도 열두 번씩 전화를 걸어왔다. 아픈 곳이 점점 더 많아지고 몸도 더 약해지고 있다는 걸 느낀 남순이 의지할 곳은 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 결정된 일을 번복할 수도 없고, 번복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이민가방 두 개를 끌고 인천공항으로 가기 전날까지 남순은 섭섭함과 원망이 담긴 눈으로 나를 쳐다봤고 나는 그의 눈빛보다 더 무거운 마음으로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6학년 때 병철을 두고 떠난 이후로 내 인생 두 번째 캐나다였다. 토론토에서 4개월 동안 어학을 배우는 동안 남순은 내가 알려준 방법으로 거의 매일 나에게 국제전화를 걸어왔다. 토론토 시각 새벽 3시였다. 안 가본 곳 없이 전 세계를 누빈 남순이 시차 개념을 모를 리 없었고 전화를 받을 때마다 새벽 3시임을 알렸으나 남순의 전화는 대부분 새벽에 걸려왔고 전화 내용은 대부분 괴로웠다. 혜순이 얼마나 ‘시근 머리'가 없는지, 당신이 얼마나 지금 몸이 아픈지 그리고 내가 떠나버려서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지…… 새벽 3시에 남순의 전화를 석 달째 받던 어느 날 나는 결국 터져버렸다. 평생 쌓여 온 울분과 서러움이 바늘에 찔린 물풍선처럼 순식간에 쏟아졌고 이성의 끈이 툭하고 끊겼던 것 같다.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나도 괴롭다는 말을 한 것 같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고, 당신의 자식 잃은 슬픔을 평생 동안 필요 이상으로 공감했고 그래서 괴로웠다, 그런데 이젠 며느리의 남편 잃은 슬픔도 좀 안쓰럽게 볼 수 없겠느냐고, 그리고 유복자로 태어나 평생 동정의 눈빛을 견디며 살아야 했던 당신 손녀의 슬픔도 좀 헤아려 주면 안 되느냐고, 누가 제 아버지 생명이랑 맞바꾼 것처럼 태어나고 싶었겠냐고, 한 번이라도 손녀의 마음을 보듬어 준 적 있었냐고, 어쩜 그렇게 혼자의 슬픔만 크고 깊냐고...... 터져 나오는 내 모진 말들을 아무 말도 없이 듣고 있던 남순에게, 한국에서 괴로울 만큼 괴로웠으니 이제 날 좀 마음 편히 해주면 안 되냐고 덧붙였고, 얼마 간의 정적 뒤에 전화는 끊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새벽 3시에 전화가 걸려오지도 내가 남순에게 건 전화가 연결되지도 않았다.


어학연수를 하든 유학을 하든 이민을 왔든 캐나다에 오고 나서 3개월쯤 지나면 들뜬 마음이 사그라들고 한국 생각이 나기 시작하다 6개월쯤 되면 향수병이 정점을 찍고 대게 캐나다에 온 지 1년 안에 한국을 다녀온다. 나는 한국에 가지 않은 채 5년이라는 시간을 캐나다에서 보냈다. 한국이 그립지 않았다기보다 두려웠다. 그렇게 가지 말라던, 그리고 다시 돌아오라던 남순의 외로움을 외면하고 급기야 가시 박힌 말로 상처를 줬던 나는 어떤 얼굴로 그를 마주하면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삼십여 년 간 쌓여있던 마음속의 말들을 토하듯이 쏟아내고 나서 지난 시간 동안 문안 인사 한 번 나누지 못했던 남순이 5년 간 얼마나 더 늙고 약해져 있을까 가늠하며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닿기도 전에 그 얼굴을 뒤로하고 다시 캐나다로 돌아올 날이 걱정됐다.


오랜만에 만난 혜순의 얼굴에도 세월이 느껴졌으나 어떤 얼굴로 오래간만의 만남을 대해야 하는지 모르진 않았다. 그저 반가우면 될 일이었다. 반면 남순과 나는 왜 평범한 할머니와 손녀로 그저 반갑고 그저 기쁠 수 없을까. 감나무가 있는 소박한 어느 시골집. 말끔하게 땋은 양갈래 머리를 하고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와 그 보다 어려 보이는 개구진 남자아이가 시골집 문을 들어서며 ‘할머니~’하고 달려가면 툇마루에서 목을 빼고 기다리던 인자한 표정의 할머니가 버선발로 달려 나와 ‘아이고, 내 새끼'하고 손녀와 손자를 한가득 껴안으면 그의 기뻐하는 표정에 카메라가 클로즈업되며 마무리되는 명절 시즌 텔레비전에서 내보내던 통조림 세트나, 한과 세트 광고처럼 우리도 평범하고 진부한 할머니와 손녀이길 바랐다. 그랬다면 5년 만에 다시 찾은 한국 방문의 발걸음이 이렇게 무겁지 않아도 될 텐데 아니, 애초에 내가 그날 새벽 모진 말을 쏟아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인천공항에서 4시간이 걸려 대구에 도착하니 시각이 너무 늦어 혜순의 집에서 자고 다음 날 남순의 집을 찾았다. 혜순이 분명 전날 전화로 내가 올 것이라 알렸을 텐데 문을 열어주고 나와 눈이 마주친 후에도 남순은 수 초간 나를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겨우 나를 알아보자 남순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명절날의 선물세트 광고의 마지막 장면처럼 손녀를 안아주거나 손을 잡아주는 대신 소파에 주저앉았고 기쁘게 웃는 대신 서러운 듯 울었다. 아따, 오랜만에 손녀 왔는데 반갑다고 손이라도 잡아주지 그 마이 통곡을 합니꺼. 언제나 그랬듯 울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광대처럼 속없이 너스레를 떠는 것 밖에 없었다.


이전 17화 뒷좌석의 베스트프렌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