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본 남순의 모습은 낯설었다. 두피가 훤히 보일 정도로 머리숱이 줄었고, 얼굴엔 더 핼쑥해졌으며, 집 안에서도 보행기구가 없으면 이동할 수 없을 정도로 거동을 힘들어했다. 머리숱과 주름보다 더 나를 짓누르는 것은 그의 눈빛이었다. 누구보다 사리분별에 능하고 머리 회전이 좋았던 남순은 언제나 부리부리한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봤다. 총기 있던 눈빛은 사라지고 흐릿해진 눈동자만 남아있었다. 5년 만에 나를 다시 만난 날 한참을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던 남순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허공을 멍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어쩐지 검었던 눈동자의 색깔도 안개가 낀 것처럼 희미하게 보였다. 다음에는 꼭 1등을 해오라고 다그치고 혼내던 그 부리부리한 눈빛을 다시 보고 싶었다. 나는 이제 꾸중 좀 듣는다고 상처받지 않는 어른이 되었는데 남순에겐 더 이상 그럴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는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는데 더 이상 받아줄 게 없는 것. 인생이 피로하고 슬픈 건 대부분 어긋나는 타이밍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며 남순이 허공에서 눈을 돌려 나를 봐주길 기다렸다. 차마 나는 묻지 못했다. 몸 건강히 별 탈없이 잘 계셨냐고. 누가 봐도 몸은 건강해 보이지 않았고, 5년 간 나의 부재 자체가 그의 삶엔 큰 ‘탈’이었을 것이었다. 남순에게 내려앉은 세월 중에서 유독 최근 5년의 시간이 가장 무겁게 그를 끌어내린 것 같았다.
미용사이기도 했지만 꼭 그것 때문이 아니라 남순은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폼생폼사의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자차도 없이 버스로 전국을 누비며 보험 수금을 하면서도 빼딱 구두(남순의 언어; 뾰족구두 즉 하이힐)와 미니스커트를 포기한 적 없었고 척추측만증으로 큰 수술을 앞두고 입원을 하러 가면서도 구찌 배니(남순의 언어; 새빨간 립스틱)를 잊지 않았다. 화장대는 (나 따위는) 용도도 알기 힘든 화장품들로 빈틈없이 가득했고 화장실 세면대를 채우고 있는 헤어제품만 열두 가지가 넘었다. 무엇보다도 남순은 옷에 대한 욕심이 엄청났는데 반 정도는 고가의 옷이었고 반 정도는 시장이나 지하상가에서 산 싸구려 옷이었다. 문제는 남순의 사전에 ‘사는 법'은 있어도 ‘버리는 법'은 없었고 그래서 평생 모은 그의 옷은 12자짜리 자개농과 12자짜리 붙박이 장을 가득 메우고도 부족해 따로 내가 온라인 오픈마켓에서 179,000원짜리 2단 대형 행거를 주문해야 할 정도였다.
5년 만에 방문한 한국이었지만 개인적인 약속을 피하고 남순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의 집에 머물렀다. 시차 적응도 되지 않은 나로서는 남순의 작은 침대는 불편했고 와이파이가 없어 답답했지만 지난 5년 간의 공백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을 어떻게든 만회하고 보상하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 마음이라도 표현하고 싶었다.
남순의 집은 금호강이 흐르는 강변 근처에 있었다. 4월이 코 앞인 그날은 강변을 따라 만개한 벚꽃을 내려다보며 베란다에 놓아둔 낡은 원목 식탁에 앉힌 남순이 좋아하는 믹스커피를 한 잔씩 마시던 참이었다. 내 머리 하러 가까. 커피를 마시며 벚꽃을 구경하던 남순이 말했다. 그래, 할매 머리 쫌 해야 되겠다. 대구에서 멋쟁이로 두 번째라 카면 서럽다던 이 여사가 헤어스타일이 영 아이다. 예전의 팔팔했던 남순이 떠올라 반색하며 맞장구쳤다. 커피를 다 마신 남순은 느린 걸음으로 안방에 들어가 옷장에서 가방 하나를 꺼내 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가는 길에 벚꽃도 보고."
냉장고에서 꺼낸 박카스와 맥주 한 캔 그리고 식탁 위에 있던 인절미를 나에게 내밀기에 나는 그것을 받아 가방에 담다가 피식 웃음이 났다. 어느 복지관에서 받았을 법한 나일론으로 된 납작한 배낭이었는데 글자가 프린팅 되어있었을 곳에 꽃무늬 원단으로 주머니가 덧대어져 있었고 그 주위로 반짝거리는 스팽글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한쪽 눈을 감고 봐도 분명 남순의 솜씨였다. 그는 어렸을 때 어깨너머로 배웠다는 재봉틀로 이것저것 고치고 만들기를 좋아했다. 손재주가 남달라 배운 적도 없다는 뜨개질도 곧잘 했다. 중학교 3학년 첫 휴대폰이 생겼을 때 그가 뜨개질로 만들어준 휴대폰 주머니와 대학교 1학년 때 첫 노트북이 생겼을 때 재봉틀로 만들어준 노트북 주머니를 나는 첫 휴대폰과 첫 노트북보다 더 아꼈었다.
할매, 아직 그래도 쌀쌀하다. 이거 입으이소. 옷걸이에서 그렇게 두꺼워 보이지 않는 얇은 봄 재킷을 꺼내 화장대에서 파운데이션과 립스틱을 바르고 있던 남순에게 건넸다.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거 가온나(가져오너라). 왜, 이거 꽃분홍색 화사하고 개않구만(괜찮은데) 마음에 안 듭니까? 색상이 너무 나이 들어 뵌다. 1932년 생 남순은 꽃분홍색 옷이 나이 들어 보인다며 다른 것으로 가져오라 했다. 밝고 화려한 걸 좋아했던 남순의 취향을 고려해 핫핑크색으로 골랐더니 퇴짜를 맞고 (남순의 말에 따르면) ‘젊은이들 칼라'인 짙은 남색 옷으로 다시 가져다주었더니 그제야 만족한 듯 옷을 받아 입었다.
소풍가방도 겉옷도 챙겼으니 준비물은 완료. 그런데 문제는 거동이었다. 곧 죽어도 휠체어는 모양이 빠진다며 집에 들이기 싫다고 했다. 그나마 혜순이 사다준 노인용 보행보조기 밖에 없었는데 다리에 힘이 없는 남순은 보행보조기를 밀고 경사를 오르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안 되겠다. 할매, 여기 고마 앉으이소. 아파트 입구 경사 앞에서 난감해진 나는 남순을 보조보행기에 앉혔다. 짐가방과 바퀴가 달려있는 쓸모가 많은 보행기였지만 걷기 불편한 노인들이 보행하다 잠시 쉬고 싶을 때 앉아 쉬기도 하라는 용도로 만든 것이지 휠체어처럼 의자에 앉은 채 이동에 용이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부실한 바퀴와 몸체 때문에 경사를 내려가는 도중 몇 번이나 위험한 순간이 있었다. 고작 3미터가량의 경사로를 겨우 내려오자 고르지 못한 보도블록이 기다리고 있었다. 5년 전보다 더 작고 가벼워진 남순은 작은 덜컹거림에도 이리저리 밀렸다.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 듯 휘청이는 가벼운 그가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곤두 세우며 울퉁불퉁한 보도블록 위로 보행기를 밀었다. 그러게 휠체어 하나 들이라니까, 할매 고집은. . . . . 뭐할라꼬, 니 없으면 이래(이렇게) 밀어줄 사람이 어딨다고.
벚꽃이 핀 강변까지 고작 5분 거리를 30분이나 걸려 도착했다. 내 몸은 3월 말의 제법 찬 날씨에도 땀으로 흠뻑 젖었다. 햇볕도 좋고 꽃도 좋은 봄날, 사람들은 다가온 봄을 느끼며 걷거나 달리거나 혹은 앉아 있거나 했다. 벤치를 골라 남순과 나란히 앉았다. 우리는 박카스와 맥주를 나눠 마셨다. 남순이 가방에서 꺼낸 인절미를 하나 건네기에 땀으로 젖은 손 대신 입으로 받아먹었다. 떡을 좋아하지 않아 평소에는 입에도 대지 않았지만 소풍이니까 까다롭게 굴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 내 입에 음식을 넣어준 적이 있었던가. 아주 어렸을 적까지 기억을 거슬러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 꽃구경 좋쟤?
응. 벚꽃 예쁘네. 오늘 햇살도 좋고. 이제 완전히 봄이네, 봄.
소풍 음식을 다 먹고 나서도 우리는 한참을 벤치에 앉아서 벚꽃을 바라봤다. 봄과 꽃과 날씨와 햇살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옛날처럼 나를 다그치는 불처럼 뜨겁고 무서운 남순을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