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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서영 Oct 27. 2024

함께할 결심

참을 수 없는 혼자의 무거움, 그 10화

설거지를 하려 소매를 걷어붙이는데 이질적인 느낌이 든다. 뭔가 허전하다 싶어 내려다보니 팔찌가 없다. 2년 내내 씻을 때도 잘 때도 벗지 않고 동고동락한 팔찌였다. 흡, 순간 호흡이 멈춘다. 초능력이 있어 바라보기만 하면 사라졌던 물건이 다시 짠 나타날 것처럼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허전한 왼쪽 손목만 한참 노려보다 가빠지는 호흡과 빨라지는 심장의 진동을 느낀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크게 한다. 고작 물건 하나 잃어버렸을 뿐인데 오래된 연인의 돌아선 뒷모습을 보는 것 같다. 감은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것)와의 인연 인연은 여기까지 인가 보다'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면 좋으련만 사실, 강제적으로 생각을 욱여넣는다. 어디선가 쿨하게 미련을 버리면 오히려 다시 돌아온다는 ‘끌어당김의 법칙'의 일종이었던 문장을 읽은 것을 기억한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는 집착이 심한 편이다. ‘편이다'라는 표현으로 순화시킨 것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부분이라는 증거다.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알만한 사람들은 눈치를 챘을 테지만 또 굳이 덧붙이는 이유는 적어도 내가 자기 객관화는 나름 잘 되어 있는 인간이라는 점이라도 어필하고 싶을 만큼 타인의 평가에 대한 집착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연못이 있다면 미련 없이 그 연못에 던져버리고 싶다. 망할 놈의 집착병. 혹시 그 연못의 신령이 나타나 금도끼 은도끼 같은 유용한 물건으로 교환해 준다 해도 (애초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집착병이 무슨 가치가 있다고 교환 제안을 하겠는가) 양심상 거절할 것이며 혹시 쓰레기 투기 벌금을 내라고 해도 기꺼이 낼 의향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내 집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람부터 물건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자랑한다. 바야흐로 때는 2016년, 캐나다에 온 지 1년이 막 지나던 때였다. 랩탑의 생애 주기를 인간의 그것으로 환산했을 때 92세 정도는 되는 낡고 낡은 랩탑으로 캐나다 컬리지 프로그램의 과제들을 겨우 해내고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면 새로 장만하겠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으나 새벽 한 시에 아침까지 제출해야 하는 과제를 두고 열두 번째 재부팅을 하고 있자니, 눈꺼풀에 파르르 진동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통장 잔고가 얼마였더라. 졸업을 하려면 아무래도 새 랩탑을 사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주로 쓰는 프로그램에 최적화되어 있다는 애플 사의 랩탑이 평소 궁금하기도 했고, 수업 시간 주위를 둘러보면 열에 아홉은 사과 로고가 박힌 랩탑을 들고 있었기에 긴 고민 없이 (그러나 큰 마음을 먹고) 애플 맥북 프로를 주문했다. 내 인생 첫 맥북 프로였다. 거의 한 달을 기다려 드디어 품에 안은 맥북 프로에게 나는 사랑에 빠져버렸다. 우아함과 성능이 만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세련된 미니멀리즘으로 디자인된 매끄러운 알루미늄 바디의 마감은 마치 이 천 피스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끼워 넣을 때의 희열을 선사했고, 시각적 아름다움 뿐 아니라 완벽한 그립감으로 촉각적 만족감까지 놓치지 않았다. 게다가 실버색 본체에 은은하게 들어오는 로고의 영롱한 불빛(당시 모델에는 로고에 백라이트가 들어왔다)은 단순한 디자인을 넘어 스타일, 더 나아가 맥북의 영혼을 담아내는 아이덴티티, 애플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완성시키며 내 오장육부 사이사이 어딘가 숨어 있을 (지도 모르는) 예술에 대한 영감과 재능을 끌어내 주리라는 확신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쯤에서 정말 숨기고 싶었던 나의 집착병에 대해 좀 더 고백하자면, 나는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면 소장용으로 하나 더 구매하는 고약한 습성이 있다. 그래야 다리를 뻗고 잠을 잘 수가 있다랄까. 문제는 책이나, 앨범음반 같은 전시용이나 소장용으로도 고려되는 종류의 물건이 아니어도 그렇다는 거다. 내가 새 맥북 프로를 셋업 한 후 가장 먼저 한 작업은 애플 웹사이트에 접속한 일이었다. 사슴 무리를 발견한 일주일 굶은 사자의 기세로 ‘Add to bag’ 버튼을 거쳐 장바구니까지 단 숨에 (손가락이) 달려갔다. 금방 배달된 레티나 13인치 2015년 식 맥북 프로로, 레티나 13인치 2015년 식 맥북 프로를 주문하려는 미친 맹수 같은 내 오른손을 마지막 순간 멈추게 한 것은 이성이나 자각심이 아니라 바로 어제 확인했던 통장 잔고의 숫자였다. 당시 학교를 다니느라 파트타임 일 조차 하지 않았는데 비싼 학비(국제학생은 일반학생의 비해 무려 3배에 달하는)가 한국에서 싸들고 온 현금을 뭉텅뭉텅 갉아먹고 있었기에 2000불이 훨씬 넘는 컴퓨터를 하나 더 사 버리면 당장 다음 학기 등록금이 불안했다. 6개월만 지나도 구식이 될 운명의 컴퓨터를 200만 원 넘는 돈을 주고, 단지 디자인이 예쁘다(물론 그것은 단순한 디자인을 넘어 하나의 스타일, 아이덴티티…… 그만하겠다)는 이유로 사다니. 워크인 클로젯에 롤렉스 수납공간이 따로 있는 잘 나가는 래퍼나, 한 점에 수억 씩 하는 작품을 그리는 화가가 그랬다면 예술가들의 돈지랄이라고 했겠지만 내가 하면 그냥, 지랄이었다. 


이런 식으로 간혹(정말 간혹이다) 쓰지도 않을 거면서 똑같은 물건을 두 개 사는 걸 볼 때마다 단순한 소유욕을 넘어 그건 집착이라고, 단순한 집착을 넘어 정신적 비정상이라고, 엄마는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쓰지 않는 것일 뿐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두 번째 물건은 내게 안심, 안정, 안도 제공이라는 아주 큰 쓰임새를 담당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첫 번째 물건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우리가 당장 쓰지도 않을 거면서 현금을 은행 계좌에 넣어두는 것과 비슷하다고 변명했다. 그러자 엄마는, ‘너는 그 두 번째 물건을 영영 쓰지 않을 게 아니냐고, 그러다 삭아서 결국 똥이 될 거라고', 통장 속 현금과는 다르다고 내 말에 반박했다. 나는 ‘세상 사람들도 죽을 때 통장 잔고가 0인 사람은 거의 없지 않으냐고, 우리는 모두 언제 쓰일지 모르는 비상금을 통장에 남겨둔 채 죽게 되지 않냐고, 통장에 든 현금과 나의 두 번째 물건은 마음의 평화를 위한 본질로서 일맥상통하며, 단지 그 본질을 담고 있는 물리적 형태만 다를 뿐’이라고 피력했다. 몇 마디 잔소리로 내 버릇이 도무지 고쳐질 것 같지 않겠다고 판단한 엄마는 우주의 진리를 깨달은 도인의 표정으로 덧붙였다. 내 ‘정신적 비정상’ 그러니까 즉, 언어의 경제성을 활용하면 내 ‘정신병'의 원인은 유아기 시절 충분한 사랑을 못 받아서인 게 분명하다고. 나도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얹었다. 나는 엄마가 내 ‘비정상성'을 품어주고 이해해 주는 것으로 충분한 사랑을 주면 이 지독한 ‘정신병’이 엄마 말대로 점차 나아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입만 살아서 엄마와의 갑론을박은 대부분 나의 승리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엄마 말은 틀리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열 명 중 6명이 이상하다고 하면 4명이 아무리 이상하지 않다고 주장해도 ‘비정상'이 되는 게 우리가 사는 사회니까. 그러니까 6명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마음의 평화를 추구해야 비로소 안정이 되는 나는 비정상이 맞았고, 그 비정상의 원흉이 유아기 시절에 받았어야 했을 사랑의 부재라는 주장도 나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뭘 어쩌겠는가. 타임머신은 여전히 이론적 논의 단계에 머물러 있어 못다 받은 사랑을 청구하기 위해 과거로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현실에서 아무나 붙잡고 내가 이런이런 고질병이 있는데 그걸 고칠 수 있도록 충분한 사랑을 줄 수 있겠냐며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집착은 물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생명이 있는 대상에게도 똑같이 아니, 어쩌면 더 했다. 어렸을 때 나는 초등학교 문방구 앞에 파는 모든 종류의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주머니를 털어 2킬로미터가 넘는 하굣길 내내 품에 안고 걸어오곤 했다. 장수풍뎅이, 사슴벌레, 전갈, 남생이, 금붕어 그리고 알록달록 강제로 염색된 병들었을 병아리……. 문방구에서 팔았던 생명체들은 다들 약속이나 한 듯 보름을 못 넘기고 죽었지만 남생이는 좀 달랐다. 내가 지어준 이름은 ‘거북이'였고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답게 열악한 환경에서 꽤 오래 살았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욕조 위 작은 플라스틱 수족관에 코를 박고 몇 시간이고 들여다보았다. 옆통수에 있는 형광 노랑 형광 주황 줄무늬가 매력적이고 헤엄치는 모습이 귀여운 아이였다. 내 새끼손가락보다 짧은 다리를 팔락거리며 헤엄치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 해도 재미있었다. 예쁘고 매끈한 돌멩이를 찾는 중대한 업무를 수행하느라 2km가 넘는 긴 하굣길이 하나도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날은 두어 개 밖에 찾지 못했고, 또 어느 날은 양 쪽 주머니가 묵직할 정도로 많이 찾기도 했다. 주어온 돌멩이를 씻은 후 수족관에 넣어주며 괜히 거북이의 등껍질을 쓰다듬기도 했다. 아직도 거북이의 선명한 줄무늬와 등껍질의 감촉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오십 년쯤은 살 것 같았고 그동안 몸집이 자꾸 커지면 오십 년 뒤에는 어떤 수족관을 구해야 하는지 고민도 했다. 거북이는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내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던 배영을 보여줬다. 나는 할머니가 빨래를 빨 때 쓰시던 한 뼘 높이의 욕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채 거북이가 물장구를 치고 앞으로 나가기를 기다렸다. 앞다리와 뒷다리, 그리고 머리까지 축 늘어진 게 아무래도 수영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 인생 최초의 죽음을 목격한 아니, 깨달은 순간이었다. 이전에 병아리나 곤충들이 죽었을 때는 내가 학교에 있을 때 할머니가 미리 옥상 밭에 묻은 후 알려주었기에 직면할 일이 없었다. 방과 후 유일한 친구였던 거북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혼자 깨닫게 된 내가 느낀 감정은 슬픔보다 당황스러움에 가까웠다. 이제 더 이상 꼬물거리는 다리들과 꿈뻑이는 눈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외출에서 돌아온 할머니가 거북이의 사망진단과 함께 옥상 텃밭에 매장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였다. 팔다리를 툭툭 털며 잠에서 깨어나듯 아무렇지 않게 두 눈을 껌뻑거리며 앞으로 헤엄쳐 나갈지 모를 일이니까. 나는 저녁 식사도 거부하고 욕조를 붙들고 울었다. 배를 위로 하고 물 위에 뜬 거북이는 화장실에서 하룻밤 더 머물렀다. 


11살, 나는 그때 어쩌면 인생의 결심을 했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다시는 어떤 대상을 두고 나와 오래도록 함께 해줄 거라는 믿음이나 확신을 가지지 않겠다고. 그리고 매끈한 돌멩이나 뜨거운 마음 따위도 주지 않겠다고. 그랬다면 그 후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꽤 세련되고 깔끔한 인연을 만드는 방법을 터득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학습된 상처와 좌절은 오래가지 않았고 나는 여전히 아끼는 물건에게, 좋아하는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지혜를 아직 터득하지 못했다. 배 터지게 밥을 먹고도 돌아서면 입을 뻐끔거리며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붕어처럼, 내 집착이 끌고 온 파멸에 몸서리를 쳐놓고도 돌아서면 또 마음을 벌렁거리며 희망을 향해 엎어지는 걸 반복했다. 이번엔 뭔가 다르다는 착각을 하면서.


반려동물 입양 권유를 고사할 때마다, ‘강아지나 고양이도 별로 안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 짧은 질문에 생략된 문장들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젓는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별로 안 좋아하세요?’ 대신 보조사 ‘도'를 사용한 것은 사람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 강아지나 고양이도 별로 안 좋아하냐는 의도가 담겨있다. 해명하자면 내 대답은 정확히 그 반대다. 나는 강아지의 방정맞은 꼬리가, 은근히 밀당하는 고양이의 도도함이 너무너무 사랑스럽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번 호감을 느끼면 24시간 내내 달라붙어 있고 싶다. 내 집착을 귀엽고 사랑스러운 버전으로 표현하면 그렇다. 애정으로 시작해 애정으로만 끝나면 얼마나 좋겠는가. 문제는 애정으로 시작해 집착으로 끝난다는 데 있다. 좋아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내 사랑은 불안과 눈물의 점철로 파국을 맞았다. 그래서 나는 좋아하는 ‘어떤 것'과 ‘함께 할 결심’을 하지 않는 쪽으로 노력 중이다. 일단 좋아하게 되어버리면 함께 하고 싶은 욕구를 외면하기 너무 어렵기 때문에 애초에 좋아하는 대상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살까 말까 고민될 땐 사지 않는다. 그러면 쓸데없이 ‘두 번째'를 사지 않아도 되니까. 어떤 사람이 무턱대고 좋아지려 할 때 눈을 감고 우주로 여행을 떠난다. 지구는 점점 작아지고 은하계가 줌아웃 되는 동안 크게 6번 심호흡한다. 그러고 나면 절절한 것 같던 내 감정도, 지질해 미칠 것 같은 내 집착도 둘 다 좀 시시해지는 기분이 든다. 


언젠가는 먼저 내 곁을 떠날 걸 알지만 반려 동물과 함께 하는 사람들, 타인과 함께 할 맹세를 하고 실제로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들, 그러다 또 작은 사람을 탄생시키며 함께할 누군가를 더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 나는 모든 ‘함께 하기로 한 사람'들이 너무너무 대단해 보이고 경외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내가 택한 삶이 용기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택한 차선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을 오랫동안 정성스럽게 들여다보는 시간을 통해 예쁜 구석도, 못난 구석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도대체 내 집착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오랫동안 고민했었다. 아마도 내가 사랑에 빠졌던 그 모습이 변해가는 걸 견디지 못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 같았다. 맥북 프로의 아름다운 실버 표면에 날 스크래치와, 흠없이 깨끗한 스크린 위에 날 손기름 자국과, 영롱한 애플로고가 희미해져 가는 것을 상상하면 미리 먼저 가슴이 그렇게도 아팠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변화하는 것은 모두 슬펐다. 반짝거리던 맥북 프로에 손때가 타는 게, 내 머리보다 풍성하던 엄마의 말간 두피가 점점 많이 보일 때, 거울 속에 비친 내 양 쪽 가슴이 지난여름보다 처져 보일 때, 다정하던 그 사람의 표정이 이제는 무표정이 되었을 때….. 심지어 창가에 둔 바질이 꽃을 피워도 기쁜 동시에 슬펐다. 그건, 모든 변화에는 어떤 식으로든 흐른 시간이 걸려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변화 자체가 슬프다기보다는 매정한 시간의 연속성에 대한 우리의 속수무책이 슬펐다. 변하는 것이 더 이상 슬프거나 두렵지 않을 때 나는 그게 진짜 어른이 되었다는 뜻처럼 여겨졌다. 흐른 시간과 흐르고 있는 시간, 그리고 앞으로 흐를 시간에 대해 담담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내공 같은 거랄까. 나도 언젠가 변화를 담담하게 지켜보고, 이미 흘러버린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진리도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될까? 그때는 함께 할 용기를 내 보고 싶다. 불안과 집착을 뺀 담백한 애정만 가지고서 말이다. 아직까지는 은하계를 줌아웃하며 심호흡하는 연습이 더 필요하다. 산책을 반기는 강아지와 츄르를 받아먹는 고양이의 순수한 행복도 열심히 배워보려 한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나를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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