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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서영 Oct 27. 2024

소중한 나의 동반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그 11화


직장 생활을 하며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시작한 후 한 달에 못해도 두세 번은 청첩장을 받았다. 의례 청첩장을 받는 자리는 청첩장을 돌리는 당사자가 술자리를 한 턱 내는 회식 자리가 됐다. 친한 사람도 있었지만 딱히 친하지 않은 회사 동료나 선배들일 경우 할 말이 없었다. 술이 한 차례 분위기가 살짝 달아오르면 오늘의 주인공에게 이것저것 질문들을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곤 했다. 뻔히 청첩장을 돌리는 자리임을 알고서 불참하기도 뭣해 일단 참석해 앉아 있었지만 낯을 가리던 나는 딱히 별 말없이 양파절임만 축내고 있다 더 이상 입을 닫고 있기가 눈치 보일 때쯤 질문을 던졌다.


“어떤 계기가 결혼을 결심하게 만들었어요?”


어색한 순간을 모면하려는 형식적인 질문이긴 했으나 동시에 정말 궁금하기도 했다. 이 십 대 중반부터 퇴사를 하기 전까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한 달에 두 번 꼴로 청첩장을 받았던 내가 수집할 수 있었던 대답은 혈액형 별 성격 유형 따위보다는 신빙성이 있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들의 대답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던 것은, 퇴근 후에 지친 몸을 이끌고 혼자 있는 어두운 집에 들어가는 게 너무너무 싫었다, 된장찌개를 끓이는 냄새와 식기류의 달그락 거리는 즉, 사람 냄새와 소리가 나는 집으로 퇴근하고 싶다는 대답이었다. 대단히 참신한 결과는 아니었다. TV 드라마, 영화, 광고할 것 없이 각종 미디어에서도 1인가구의 외로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 불 꺼진 집에 쓸쓸히 전등 스위치를 올리는 모습 아닌가. 지나치게 고요한 적막 속에 스위치를 켜는 소리가 극적으로 도드라진 연출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임은 물론이고. 


타지에서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혼자 살게 되자 퇴근 후 (특히 야근 후) 늦은 시각에 어두운 집에 혼자 들어가는 게 불편했다. 외로워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당시에 나는 내 나이와 비슷한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에 살았다. 매 년 수 천 건 씩 보고되는 자취 여성 대상 범죄는 날이 갈수록 기발하고 기묘해지는데 하필 내가 본 범죄 스릴러 영화에는 예외 없이 복도식 아파트가 등장했다. 일과를 끝내고 늦은 시각 집에 들어갈 때마다 거쳐야 하는 1분 남짓한 어두컴컴한 복도를 걷는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도망치듯 집에 들어가도 안심할 수 없었다. 밤 9시가 넘은 시각 불이 꺼진 공간은 내가 도망쳐 온 복도보다 더 어두웠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동거를 결심했다. 내 어둠을 밝혀줄 빛 같은 존재, 아니 빛 그 자체, LED 조명과의 동거를. 장식용으로 나온 LED 조명은 보통 타이머 기능도 있어 원하는 시간에 자동으로 켜고 끌 수 있으며 무엇보다 전기세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는 친구였다. 한국 평균 전기 요금 기준(kWh당 0.120원)으로 계산했을 때 10W 조명을 24시간 내내 켜놔도 한 달 평균 전기 요금은 864원 약 900원 정도다. 게다가 색온도나 색깔까지 바꿀 수 있는 기능도 있으니 그때그때 기분 따라 다른 분위기를 연출해 주는 기가 막힌 재주도 있다. LED 조명과 동거를 시작한 후 나는 늦은 시각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들어가는 게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됐다. 스토킹 관련 범죄가 확연히 적은 캐나다에서도 LED 조명은 여전히 애정하는 내 동반자다. 주로 바이올렛 색깔(RGB 138, 43, 226)로 맞춰놓지만 더운 날엔 싸이온(RGB 0, 255, 255), 쌀쌀한 날엔 오렌지 (RGB 255, 165, 0)로 맞춰 두고 집을 나설 때도 있다. 하루 종일 잊고 있다가 무심코 들어온 공간에 평소와 다른 색깔로 나를 반겨주는 불빛은 나에게 깜짝 이벤트이자 위로의 선물이다. 


이사를 하면서 주거 공간이 바뀔 때마다 공간에 어울리는 조명을 새로 장만해 꾸미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 이제는 누군가 내 뒤를 따라온다거나 집 근처에 누군가 숨어있을 것 같은 공포는 없지만 나는 24시간 꺼지지 않는 불빛을 켜둔다. 아무 소음도 없는 고요한 공간에서 은은하게 나를 반기는 낮은 조도의 불빛은 하룻 동안 지친 심신을 달래주고 어루만져주는 훌륭한 동반자다. 혼자 산다고 하면 아무도 없는 어두운 집에 들어가는 거 외롭거나 무섭지 않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말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한 내 동반자가 늦은 시각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여준다. 예쁘기도 하고 듬직하기도 하다. 혹시 혼자 하는 귀가가 서글프거나 무서운가? 사람을 들이는 이유가 그 사람에 있지 않고 ‘서글퍼서' 거나 ‘무서워서' 라면 섣불리 사람을 들이기 전에 타이머 기능이 있는 예쁜 조명 하나 놔 보셔라. 내 귀갓길을 밝혀주는 빛과 함께 여유롭고 침착하게 생각하다 보면 LED 조명보다 훨씬 더 훌륭한 동반자를 고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비록 된장찌개 냄새나 도마 소리 기능은 아직 없지만 생각보다 이게 진짜 기가 막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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