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혼자의 무거움, 그 12화
나는 정말 똑똑하게 기억한다. 열 살 전 후로 엄마 손을 잡고 엄마의 먼 친척 댁에 따라갔다. 정확히 무슨 행사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분위기가 밝은 걸로 봐서는 잔치(결혼식이나 환갑 등) 후 뒤풀이(?) 겸 해서 그 친척 집에 모였었던 것 같다. 친조모 친(엄마의 시부모)의 눈치를 보느라 엄마의 친지 쪽 행사를 1박 2일로 참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그때 분위기는 정말 말 그대로 잔칫집 분위기였다. 내가 살던 대구와 꽤 멀리 떨어진 지역의 아파트였는데 크기는 30평대 후반 혹은 40평 대 초반으로 방이 3개 이상이었으며 꽤 넓은 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넓은 집이었음에도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야 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엄마와 나를 포함한 여자들은 작은 방을 차지하고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나는 (다시 말하지만)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방의 장판이 어떤 색깔이며 어떤 구조였는지 정확히 기억할 만큼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렇게까지 밑밥을 까는 이유는 그날 엄마가 했던 말을 지금 와서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에 대해 좀 억울한 심정이기 때문이다. 엄마보다 손 윗사람처럼 보이는 어떤 사람이 엄마에게 뭐라고 말을 걸었고 그 질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 대답은 어제일처럼 생생하다.
“저는 우리 딸이 결혼 안 해도 돼요. 혼자서 잘 살 수 있으면 굳이 결혼 안 하고 당당하고 자유롭게 혼자 사는 것도 괜찮죠, 뭐.”
결혼이 뭔지 또 자유가 뭔지 정확히 잘 몰랐지만 엄마의 말은 당시에 꽤나 파격적인 발언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어르신들이 이렇게 많은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엄마가 발표한 만큼 나는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구나 싶었고 무슨 주제인지는 잘 몰라도 왠지 안심이 되었다. 그래서 훗날 비혼을 마음먹었을 때도 엄마에게 큰 부담 없이 내 의견을 말했고, 내 결심의 밑바닥에는 내가 기억하는 그날 엄마의 진보적이고 쿨한 발언이 큰 밑거름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그때 엄마의 반응.
“옴마야! 여자는 자고로 사랑을 받고 살아야지 야가 무슨 소리고! 그리고 나는 그런 말 한 기억이 전혀 없데이!?”
이 십 플러스 N 년 동안 그날 엄마가 한 말을 반복 재생하며 엄마에게 내 결심을 이해 아니 응원까지 생각했는데 청천벽력 같은 반응에 망연자실했다. 어머니… 이제 와서 기억을 못 하신다고요? 처음에는 그날의 세세한 상황들을 묘사하는 것으로 나의 기억력을 어필하며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 고군분투했으나 결국 포기했다. 나는 그날 밤 엄마가 어른들이 주는 소주를 네 잔이나 마셨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지만 엄마는 그런 잔치 날이 있었다는 것 자체도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엄마의 바람대로 결혼이나 연애를 하는 딸이 되어 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엄마도 뭐라 할 게 못 되었다. 엄마도 내 의견과는 상관없이 연애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10년 정도 만나고 있는 엄마의 남자친구는 사실 연애 초반에 상당한 고민거리였다. 자라온 배경과 성격 차이로 인해 매일 싸우다 결국 저명하다는 대학 교수를 찾아가 부부 상담까지 받기도 했다. 부부가 된 적 없는 남녀가 부부 상담 치료라니. 오래된 나무일 수록 중심 부분인 심재(heartwood)가 더욱 단단해지는 것처럼 사람도 나이가 많을수록 철학과 신념이 너무 굳건해서 맞춰 살기 더 어렵다고들 했다. 아마 엄마와 엄마의 남자친구는 그래서 더 힘들었을 것이었다. 엄마의 연애 초반에 하소연을 듣고 있자니 더욱더 엄마의 연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 옛말에도, 엄마가 아무리 대단하고 멋진 남자를 데려온대도 딸의 성에 차기는 힘든 법이라 하지 않은가. 다행히도 지금은 상담 치료의 성과인지 시간 속에 쌓인 안정감인지 두 분의 관계가 많이 안정된 것 같아 안심이다.
엄마는 이제 나에게 결혼을 권유하지 않는다. 낳아놓고 지금까지 관찰한 결과 엄마가 뭐라 한들 고분고분 들을 딸이 아니라는 걸 몸소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언젠가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듯 말하는 걸 들었다. 하지만 엄마가 굳이 입 밖에 꺼내지 않아도 여전히 내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받고 또 사랑하고 살기를 바란다는 걸 안다. 딸이 나이 들어 외로울까 봐 염려하는 엄마의 마음이라는 걸 충분히 알기에 예전처럼 바득바득 성깔을 부리지 않고 ‘네네'하며 넘길 줄 아는 성숙한(?) 딸 정도는 됐다. 2년 전 엄마와 처음으로 단 둘이 긴 여행을 떠났다. 8박 9일 간 강원도를 둘이서 여행하며 이런저런 마음속 깊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엄마와 함께 삼척 부채길을 걷는데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러워 중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 모녀는 ‘일단 시작했으면 미끄러지더라도 갈 때까지 가봐야지' 정신에 만장일치(?)를 했고 의기투합한 끝에, 빤스까지 비에 홀딱 젖은 것만 빼면 순조롭게 일정을 마칠 수 있었다. 그때 우리는 ‘동반자'라는 주제로 우리가 걸었던 산책만큼 느리고 긴 대화를 나눴다. 이 십 대 꽃 같은 나이에 과부가 된 엄마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야 마음이 좀 맞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집에 살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서로 의지하고 자주 만나는 것은 좋지만 이제 와서 한 공간에서 아웅다웅하며 치약 짜는 법, 세탁기 돌리는 법까지 굳이 지지고 볶아가며 맞추는데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산책을 하다 말고 엄마에게 하이파이브를 제안했다. 한여름 갈증 속에 들이키는 한 모금의 맥주 같은 순간이었다.
“엄마,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라니까! 이제야 말이 좀 통하시네!”
내가 이기적이고 반사회적이며 게으른 건지 잘 모르겠지만 아니 백 번 그렇다고 쳐도 나는 그걸 해낼 자신도 해내야 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다. 멀리서 보면 희극인데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인생도 사람도 좀 떨어져 봐야 사랑스럽고 오랫동안 좋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방귀 냄새 공유하며 부대끼며 정붙이고 사는 것도 사랑이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긴장감을 가지는 것도 사랑일 수 있지 않은가. 무엇이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각자의 취향과 스스로의 최선을 알고 있느냐의 문제였다. 엄마는 엄마가 사는 같은 아파트 바로 옆 동에 아저씨(엄마의 남자친구)가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거리 같다고 말했고, 나는 나이에 따라 필요한 거리가 달라질 것 같다고 했다. 3,40대까지는 대중교통으로 30분에서 한 시간 거리면 제일 좋을 것 같고, 5,60대가 되면 대중교통으로 20분 정도가 좋을 것 같다. 그 이후에는 차로 5분,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도 20분 내외의 거리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는 각자의 애인이 유머감각이 있었으면 좋겠고 얼굴은 손석구 교양머리(?)는 손석희 정도 됐으면 좋겠다는 판타지 소설을 신나게 쓰며 비에 젖은 산책로를 성공적으로 완주했다. 엄마는 내 지랄 맞은 성격을 알기에 더 이상 닦달하진 않지만 딸이 외로울까 봐 얼른 누구라도 만났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은 괜찮지만 언젠가 미래에 외로울까 봐 지금 사람을 만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런 조바심으로 만나봤자 좋은 인연으로 연결될 확률은 지극히 낮다는 걸 엄마도 나도 안다. 사람은 저축도 보험도 아니다. 그러니까 보장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원금 보장 없는 주식과 비슷하다. 생각보다 형편없는 결과를 안겨줄 수도, 예상 밖의 대박을 칠 수도 있다. 엄마에게 아빠는 상장 폐지의 날벼락이었다. 시댁 살림은 넉넉했고, 남편은 능력 있고, 인물도 훤했으며 심지어 와이프 사랑이 대단했던 우량 중의 우량 주식이었던 아빠는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았을 때 불의의 사고로 죽어버렸다. 젊음과 인생이라는 전재산을 몰빵한 어린 아내는 만삭이 된 배를 안고 주저앉았을 것이다. 게다가 멀쩡히 길러놓은 외동딸은 갑자기 캐나다에 가서는 진작 결혼하고 애 낳고 살 나이에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제와서 또 다시 새로운 공부를 하겠다고 바둥대고 있으니 수익실현의 꿈은커녕 장기간 고점에서 물린 주식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도 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며 서로의 정신 승리를 응원한다. 비록 초기 투자는 상장 폐지의 비극을 맞았지만 그때 얻은 시드(머니)로 꽤 유머러스한 딸도 얻었고, 지금 만족스러운 남자친구도 있으니 엄마의 인생을 넓고 길게 보면 우상향인 게 확실하다. 워런 버핏 할아버지도 첫 투자는 11살이었으나 56세가 되어서야 억만장자로 등극했다고 하지 않는가. 엄마의 환갑 연애를 옆에서 지켜본 바 투자도 인생도 조바심을 낸다고 되는 건 아니라는 큰 깨달음을 되새기며 조용히 주식계좌 창을 닫는다.